춤추는 공간에서 사람은 ‘춤추는 남자’와 ‘춤추는 여자’로만 구분된다. 그 남자가 부자인지 게이인지, 그 여자가 늙었는지 예쁜지는 그다지 중요하진 않다(물론 남녀 모두 외모가 출중하면 사교댄스장에서 춤 신청이 많이 들어오긴 한다). 한 사람을 둘러싼 온갖 조건들을 벗어던지고 그만의 민낯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춤이다. 이 연극에서 72세의 할머니 릴리(고두심)가 외치는 위의 말은 춤, 특히 남녀가 함께 추는 커플 댄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목사의 아내이자 30년간 교사로 살아온 릴리는 30대의 방문교습 댄스강사 마이클(지현준)에게 6주 동안 스윙, 탱고, 비엔나 왈츠, 폭스트롯, 차차차, 컨템포러리 댄스 등 여섯 가지 춤을 배운다. 릴리는 이미 이 춤들을 출 줄 알지만, 그럼에도 춤 교습을 받는다. 함께 춤 출 파트너가 필요해서다.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손을 잡고 춤출 때 릴리는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혹은 할머니도 아닌 ‘여자’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게이다. 사회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산다. 하지만 릴리 앞에선 그저 여자의 움직임을 리드하는 춤추는 남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마흔 살이나 많은 릴리에게 “아가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연극은 릴리와 마이클이 함께 춤을 추면서 상처를 털어놓고 아픔을 치유하며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특정 춤과 두 사람의 사연을 교차해 보여주는 구성은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다. 두 사람의 춤도 제법 볼만하다. 최근 종영된 MBC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출연진이 보여준 화려한 춤사위를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중년 이상이라면 더 공감할 수 있겠지만 젊은이가 보기에도 좋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인간이 가진 근원적 외로움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다만 ‘춤’ 하면 ‘바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 연극을 계기로 제대로 ‘춤바람’이 나면 좋을 것 같다. 혼자 추는 춤 말고 남녀가 함께 추는 춤으로. 남녀가 서로에게 의지하되 자신의 중심을 잡고 서있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이끌되 강요하지 않으며, 내 감정을 발산하되 상대방의 감정과 교감할 수 있어야 아름다운 춤이 탄생한다. 이것이 곧 인생이 아닐까. 직접 춤을 춰 보면 이 연극에서 구구절절 쏟아내는 사연들은 오히려 사족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 : i : : 9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5만원, 7만 원. 1588-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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