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명은 고두심이다. 몸뻬바지를 입고 억척스럽게 자녀들을 키우는 우리의 어머니 역을 가장 잘 소화했던 배우다. 그런 고두심이 젊은 남자와 춤바람(?)이 났다.
지난달 24일 막을 올린 연극 ‘댄스레슨’은 72세 여성 릴리 해리슨이 방문 댄스 강사 마이클에게 스윙·탱고·비엔나·왈츠·폭스트롯·차차차·컨템퍼러리 등 여섯 가지 춤을 배우며 자아를 찾고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극이다.
1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공연장에서 고두심을 만났다. 공연을 마친 직후였지만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환한 웃음을 보였다. ‘국민 어머니’처럼 온화하고 다정하게 마치 기자를 딸 대하듯 했다. 만날 때마다 프로 중의 프로라는 걸 느끼게 된다.
<다음은 고두심과의 일문일답>
- 공연을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됐다.
“정신 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이제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다. 공연을 하면서 이 연극이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느낀다. 처음엔 춤에 매력을 느껴 출연하기로 결정했지만 춤은 연결고리였다. 지금은 작품 자체에 빠져들고 있다.”
- 데뷔 40주년에 연극을 하기로 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다. 그렇다고 동료배우들에게 흡족하게 출연료를 주면서 함께 연극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이 고두심이 못할 것 같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댄스레슨’이 들어왔고…사람들이 내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모습에 깜짝 놀랄 거라는 생각에 기뻤다.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 극 중 릴리는 72세 여성이다.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릴리가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릴리는 평생 목사 사모로 살아왔다. 그리고 남편과 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다시 여성으로 돌아왔을 때 ‘아 나는 꿈 많은 소녀였지’라고 추억했던 것 같다. 그러다 상처 입은 젊은 댄스강사를 만나 서로를 치유하게 된 거다. 어떻게 보면 그런 행복을 느끼고 간 릴리는 행복한거다. 그런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가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 그럼 이 작품을 통해 배우 고두심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일단 춤을 배웠다. (웃음) 춤이라는건 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접촉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접촉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마이클과는 사랑의 한 부분인 우정이지. 사랑에는 여러 빛깔이 있으니까. 또, 여성으로서 이런 작품을 한다는 게 행운이다. 사실 많은 작품을 출연하다 보면, 훈련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고 저절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는데 ‘댄스레슨’은 후자이다. 릴리가 내 나이또래이다 보니 확 와 닿는다.”
- 극을 보니까, 장년층 못지 않게 30~40대의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관객 중에서 30~40대의 반응이 가장 좋다. 그들이 태어난 시기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때였다. 인터넷으로 정보도 많이 얻고… 반면, 50대 분들은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을 잘 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관람하는 편인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아이맥스(IMAX), 3D같은 것은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다. 공연하는 사람도 그런 것에 문외안이다.(웃음)”
- ‘친정엄마’ 이후 5년 만에 무대 복귀다.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남다른 정도가 아니다. 드라마는 편집이 있지 않나. NG를 내면 후배들에게 창피하니까 잘 내지 않는다. 하지만 밤샘 촬영을 하면 한번씩 날 때가 있다. 하지만 공연은 NG가 불가능하지 않냐. 마치 백조가 물 아래서 다리를 떨고 있듯 다리가 후덜덜 거린다. 하지만 무대는 내가 에너지를 주는 만큼 에너지를 받는 장소다. 현장은 공포와 짜릿함이 공존한다.”
- 아직도 무대가 떨린다고 하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무대 뒤에선 심호흡을 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연극 ‘친정엄마’는 아무래도 한국의 어머니상을 연기하는 거니까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댄스레슨’은 생활용어가 아닌 ‘아무리 절박하다고 해도 기회주의는 용납할 수 없어’라는 대사 같은 게 나오니까 자칫 정신을 놓으면 큰일이다.”
- 춤은 얼마 동안 배운 건지.
“6개월 전부터 촬영하며 틈틈이 배웠다. 나이를 먹다보니 저번에 배운 댄스를 해보라고 하면 못하겠더라.(웃음) 발에 불이 나도록 배우다보니 요즘엔 발바닥을 차가운 곳에 둔다. 잘 때도 발바닥이 후끈후끈 거린다. 게다가 왼쪽 무릎이 좀 안 좋은데 탱고를 배울 때, 왼쪽 무릎에 힘을 주고 있어서 좀 힘들었다. 그런데 춤을 배우며 허리에 힘이 생기고 근력이 생긴 것 같다. 배우긴 참 잘한 것 같고 앞으로도 쭉 배우는 게 목표다.”
- 춤을 추며 몸매도 날씬해진 것 같다.
“맞다. 살이 많이 빠졌다. 몸뻬바지를 입으면 편하니까 살이 찌는데 춤을 배우다보니 허리도 잘록해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한테 ‘뒷모습은 젊은 여성인 줄 알았는데 앞모습은 할머니다’라는 소리도 들었다.(웃음)”
-6가지 댄스마다 옷이 다 다른데, 참 빨리 갈아입는다.
“갈아입는 게 정말 힘들다. 옷을 갈아 입혀주는 분들도 있는데 옷과 신발에 땀이 차니 잘 벗겨지지도 않지, 속옷은 자꾸 나오지…옷을 갈아입는 연습도 만날 했는데 지금도 자칫하면 타이밍을 놓치기가 쉽다. (지)현준이가 센스 있게 상황을 잘 처리한다.”
- 까마득한 후배, 지현준과의 호흡은 어떤가.
“까마득한 후배 같지 않다. 아들 뻘 되는 나이니까…아주 훌륭한 후배다. 배우로서 장기도 많고 악기도 잘 다룬다. 무엇보다 극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성실하다. 연습시간 1시간 먼저 일찍 와서 연습하고 있다. 예쁜 맘에 ‘혼자만 잘하겠다 이거지?’ 라고 웃으며 말한다.”
- 최근 토크쇼에서 나간 것이 화제가 됐다.
“참, 토크쇼라는 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더라. 배우의 근황이나 작품에 대해서 묻는 건 참 좋은데 시시콜콜한 옛날 일들, 특히 오장육부가 뒤집힐 만큼 상처가 되는 일들을 물어볼 때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그냥 ‘고두심’이라는 배우만 이야기하면 안 될까. 행복하지도 좋지도 않은 이야기인데 말이다.”
- 릴리처럼 또 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내 친구가 젊었을 때, ‘내가 늙으면 너랑 안 놀아줄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스케줄 때문에 많이 바빴다. 그래서 겨우 시간이 날 때만 그 친구를 만났었다. 그러니 친구도 이런 내가 얄밉지 않겠는가. 그런데 친구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충격이었다. 또 나이가 들면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지 않는가. 그래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도자기를 배우고 싶다. 작품이야 엉망진창이 될지 몰라도 내가 느끼는 뭔가가 물체로 나오지 않을까. 춤도 마저 배우고 싶다. 파트너를 만들어서라도 춤을 배우고 싶다. 그 외에는 텃밭에서 채소 심고 뭐 그런 거다.”
-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기회가 닿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꿈에 도전했으면 좋겠다. 물론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일은 안 되지만…할 수 있음에도 게을러서 도전을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리 연극에 ‘알뜰히 움직여 일주일을 4번 살면 한달, 이건 생존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부지런히 할 수 있는 것은 경험해보고 인생의 다른 맛을 느끼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베테랑 배우 고두심을 만나면서 가장 깊었던 것은 인터뷰가 아닌 공연 직후 고두심과 한 어린 소녀팬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어린 소녀는 영국으로 공부를 하기 전 고두심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소녀는 고두심을 보자 고두심이 출연한 작품에 대해 말했고 기쁜 나머지, 울기도 했다. 그러자 고두심은 “왜 울어, 울지마. 아줌마 작품을 기억해줘서 너무 고마워. 영국 가서 공부 열심히 해” 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사진제공ㅣCJ E&M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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