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등 뒤를 지나치는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여기저기서 “쟤, 공대 다닌대”라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1984년 6월 20일 오후,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가 열린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대기실. 본선 진출자를 소개하는 팸플릿에 홍승엽(50·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은 어떤 수상 경력도 없이 ‘경희대 섬유공학과 4학년’이라고만 돼 있었다. 그때까지 무용을 배운 기간은 1년 11개월. 어렸을 적 어머니 손을 잡고 무용을 시작했을 경쟁자들의 얼굴에는 ‘말도 안 돼’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날 밤 대상은 그의 차지였다.
무용수사진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온 지 1년. 별 생각 없이 공대생이 돼 만날 놀러만 다니다 학년말이 되니 ‘뭘 하고 먹고살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버지 같은 월급쟁이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일기장에 적은 것은 ‘음악, 아니면 무용수’였다. 무용…? 일기장을 덮었다. “제가 처한 현실과는 너무 안 맞는 거였으니까요. ‘다시 생각하자. 내가 어떻게 하겠어.’ 그랬죠.”
얌전하고 조용하고 소극적인 학생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스스로 손을 들어 발표한 적이 다섯 번도 되지 않았다. 같이 놀던 한두 살 위 동네 형들이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해 심심해지자 “나도 학교에 가고 싶다”고 어머니를 조른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홍승엽의 어머니는 5형제 중 막내아들이 일찍부터 학구열에 불타오르나 보다 했다. 마을 근처 학교가 아니라 당시 대구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대구교대부속국민학교(현 대구교대부설초등학교)에 집어넣었다. 매일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통학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학교에 정작 동네 친구는 한 명도 다니지 않았다. 다른 급우보다 두 살이나 어린 그는 적응을 하지 못했다. 살이 빠졌고 의기소침해졌다.
“(그때부터) 속에서 많이 끓었던가 봐요.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는 느낌이 왔어요. 밖으로 터뜨리고 싶은데 성격은 무척 내성적이라는 데서 오는 모순, 그런 것들이 내 속에서 꿈틀거리더라고요.”
그가 고2였을 때 형들은 변호사와 외교관, 아니면 ‘명문대생’이었다. 형들이 보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나 ‘뉴스위크’를 뒤적거리다 보면 예술면에 간혹 무용수들의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사진만 오려서 코팅을 하고 자기 방 한쪽 벽에다 붙여 나갔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누구 앞에서 춤을 춰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벽에 줄줄이 늘어선 사진이 그냥 좋았다.
그 사진들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대학
2학년 1학기 말, 세 번째로 일기장에 ‘무용이 하고 싶다’고 적을 때였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용인데 하고 싶다는 것만으로 인생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일까’ 하며 이전 6개월 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결심하니까 무용수 사진들이 기억났어요.” 그리고 그는 남성이 춤을 배울 수 있는 무용실을 찾아다녔다.
무병(舞病)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년)에서 탄광촌 소년 빌리는 런던 왕립발레학교 입학을 위한 오디션을 본다. 제멋대로 춤을 추고 나가는 빌리에게 심사위원이 묻는다. “너는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니?” 빌리가 대답한다. “저는 춤을 출 때 전기(電氣)가 돼요. 전기가 돼서 공기 속을 날아다녀요.”
홍승엽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 공대출신의 무용계 독립군 “나는, 내 춤에 자신있고 내 몸에 자신있다” ▼
“속으로 저 시나리오 작가가 어떻게 알고 저런 대사를 썼을까 했어요. 정말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에너지를 가진 무용수만이 아는 느낌이라고요.” 전기가 되는 느낌. 그는 이를 ‘무당(巫堂)만 무병(巫病)에 걸리는 게 아니라 무용수도 무병에 걸린다’고 표현했다.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되는 병,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파동처럼 몸으로 쑥 들어와 몸과 같이 저절로 놀아 버리는 병. 그 무병을 사실은 그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
1980년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밀집한 대입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집을 나가기 전 몰래 형들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전축이 있었다. 문을 꼭 닫고 창문에는 커튼을 친 다음 조용히 음악을 틀었다. 아무도 없는 방. 그는 혼자 10분 남짓 춤을 췄다. 단지 10분이라도 음악과 함께 몸을 풀어 보고 싶었다. 1년 동안 이 습관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됐다. “아무도 몰랐어요. 지금까지 우리 엄마도 몰라요. 그냥 몸을 움직이는 거. 그게 아주 좋았어요.”
대학에 들어와 학사경고를 받으며 보낸 1학년 때, 그가 자주 들렀던 곳은 지금의 나이트클럽 같은 이른바 디스코텍이었다. 수줍음 많던 애가 춤추는 데만 가면 흥에 겨워 몸을 움직여 대니 같이 간 친구들은 놀라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친구들은 그가 무병을 앓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다고 당시 유행하던 디스코나 허슬을 따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의 어느 누구와도 다른 그만의 춤사위였다.
“좋은 춤꾼은 (자신만의) 몸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무용수 중에 가끔 나와요.” 훈련된 어떤 몸의 모양의 아니라 어떻게 구기더라도 몸에서 리듬이 나오고 멋이 풍기는 그런 무용수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자기만의 몸의 언어로 지금까지 춤을 춰 왔고 인정을 받았다.
새로운 길
2년 전 창단한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그가 선임되자 무용계는 술렁거렸다. 그의 지인 한 사람이 “어떻게 홍승엽이가 될 수 있는 거지?”라고 놀랄 정도였다. 그는 무용계의 주류가 아니었다. 무용계 안팎에서 ‘독립군’으로 불렸고 자신은 스스로를 ‘외딴 섬’이었다고 했다. 공대 출신이라는 것도 그랬고, 그 자신도 주류에 드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나는 본류에서 벗어난 지류(支流)겠지요. 하지만 이미 정체돼 흐르지 않는 본류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작더라도 새롭게 나타나는 싹을 키워야 한다고 믿었고요.”
허세가 아니었다. 한창 잘나가던 20대 후반에 그는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 고난의 3년을 보냈다. 좀 더 정통적인 무용을 배워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한국 현대무용의 총아가 존재감 없는 말단 발레리노로 변했지만 그는 더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해외 선진 무용을 접하기 위해 세 차례나 직접 현지에 가서 몸으로 부닥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1993년 창단한 자신의 무용단 ‘댄스시어터 온’이 2000년 프랑스 리옹댄스비엔날레에 초청돼 호평을 받으면서 결실을 보았다. “나는 분명히 (내 무용에) 자신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리옹에서는 성공한 거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게 가장 기뻤어요.”
예술감독 임기는 3년. 이제 1년 남았다. 그러나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면 돼요. 그때 가서 또 뜻이 있다면 새로운 길을 나한테 내주겠지요.”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춰 볼 때마다 몸에서 빛이 난다는 홍승엽. 그의 몸 안팎이 모두 단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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