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는 ‘동방서열지국’이다. 우리가 예법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대한 것이다. 대등한 관계의 인간이 서로 존중해주는,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인은 왜 ‘너’나 ‘당신’ 같은 2인칭 대명사를 놔두고 앞에 앉은 사람을 부장님, 과장님 같은 직함으로 부르는가? 나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을 2인칭 대명사로 부르는 것은 그와 내가 동등한 관계라는 뜻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뭐? 당신 지금 나보고 ‘당신’이라고 했어?”)
사실 윗사람 앞에서는 1인칭 대명사도 가급적 삼가고 아예 나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 미국인은 자기가 다니는 회사를 ‘마이 컴퍼니’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내 회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기업 오너뿐이다.
게다가 그 서열이란 것이 얼마나 복잡한가.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윗사람이 아니다. 군대 내무반에서는 나이보다 입대 시점이 더 중요하다. 검사, 기자, 연예인도 비슷하다. 고용인-피고용인, 원청업체-하청업체에서는 또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불편한 진실 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서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선 ‘서열 정하기’에 예외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지간히 출세를 해도 그렇고, 어지간히 분위기가 흐트러져도 그렇다. 그룹 사장단회의 때에도 상석에 앉을 사장, 말석에 앉을 사장이 정해져 있고, 장관들도 행사장에 입장하는 순서가 있다. “오늘은 회사 일 다 잊고, 소주 한잔하세”라는 술자리에서도 막내는 숟가락 젓가락 놔야 한다(밑에 휴지 한 장 깔아서).
게다가 내가 아무리 위아래 구별 없이 공평하게 공손한 자세를 취한다 한들, 서열이란 구조는 그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향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을 내가 깍듯하게 대하면 그건 ‘친절을 베푸는’ 행위가 된다. 윗사람에게 살갑게 굴면 나는 ‘받들어 모시는’ 중이다.
동방서열지국에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는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르다. 자기에게 허용된 만큼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 ‘분수를 안다’고 표현한다. 어른은 어른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검찰은 검찰답게, 경찰은 경찰답게. 이 질서 안에서, 윗사람답지 못한 윗사람을 만났을 때 아랫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서 인간 사이에, 또는 기관 사이에 지켜야 할 당연한 배려가 서열 사회에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호의’가 된다. 아랫사람은 그걸 당연하게 기대하면 안 된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주양 검사(류승범)는 검찰이 경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경찰 내사 정보를 살펴보려고 해도 경찰은 찍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경찰이 불쾌해할 수 있다”는 수사관의 우려에 그는 이렇게 대응한다.
“(빈정거리는 말투로) 경찰이 불쾌해한다? 경찰이 불쾌해하면 안 되지. 아, 내가 잘못했네. 아,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어. (중략) 대한민국 일개 검사가 정말 경찰을 아주 불쾌하게 할 뻔했어. (중략) 거, 경찰들이 불쾌해할 수 있으니까 일들 하지 마!!! 경찰들 불쾌할 일들 하지 마!!! 경찰한테 허락받고 일해!!! 내 얘기 똑바로 들어, 엉?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상대방 기분 맞춰주다 보면 우리가 일을 못 한다고.”
불편한 진실 셋. 결국에는 그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때부터 불쑥불쑥 자신에게 놀라게 된다. 손아랫사람이 격의 없이 굴면 속으로 ‘어쭈?’ 한다. 배려를 당연히 여기는 후배들이 못마땅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대사에 당신은 눈살을 찌푸렸는가, 아니면 ‘옳다’고 무릎을 쳤는가.
tesomiom 언론인들 모인 데에서는 말석에 가깝게 앉아야 하고, 문인 모임에서는 말석에 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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