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를 꿈꾼 그들-정민 교수의 삼국유사 깊이 읽기/정민 지음·변명환 사진
376쪽·1만8000원·문학의문학
2009년 1월 19일, 백제 미륵사지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호(사리를 담은 항아리)와 사리봉안기(사리를 넣으면서 관련 내용을 기록한 것)가 공개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639년(무왕 40년)에 묻힌 이 기록은 1370년 만에 깨어나 백제 최대 규모 사찰인 미륵사의 창건자와 창건 연대, 내력을 처음 밝혀주었다. 당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무왕과 함께 미륵사를 창건한 인물이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서동요를 지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뒤 왕후의 부탁으로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백제 귀족 사탁적덕(沙M積德·성을 사택·沙宅으로 보기도 함)의 딸이 당시 왕후로 절을 창건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서동(무왕의 어릴 적 이름)과 선화공주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는 한낱 허구일 뿐일까.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간에서 선화공주는 분명 무왕과 결혼했으며 미륵사 창건을 추진했고, 다만 완공 훨씬 전에 세상을 떴기에 사리봉안기에는 완공 당시 왕후였던 사탁씨 이름만 남았다고 주장한다. 또 의자왕의 생모는 사탁씨가 아닌 선화공주라고 덧붙인다. ‘삼국유사’와 ‘일본서기’ 등을 두루 분석한 결과다.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등 18세기 조선 지식인과 한시에 관한 다수의 저서로 대중에게 친숙한 저자가 이번에는 삼국유사를 파헤쳤다. 삼국유사 원전 읽기를 시도하다 번번이 포기했어도 좌절할 것까진 없다. 저자도 학생들과 함께 삼국유사를 읽을 때마다 난독증의 울렁거림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삼국유사에는 알쏭달쏭 종잡을 수 없거나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저자는 “황당한 이야기 속에 진실이 숨 쉰다”며 삼국유사를 가리켜 “상상력의 보물창고이자 우리 문화의 비밀을 푸는 집 코드(zip code)”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로처럼 얽혀 있는 삼국유사 속 이야기들의 의미를 불교를 중심으로 풀어간다. 삼국유사를 ‘열린 텍스트’로 보고 여러 사료들을 참조해 저자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인 신라 경문왕의 이야기에도 귀가 솔깃해진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이 즉위하고 나서 귀가 당나귀 귀처럼 자랐는데 복두장이(옛날 왕이나 벼슬아치가 머리에 쓰던 복두를 만드는 사람)만 그 사실을 알았다고 씌어 있다. 복두장이가 죽기 직전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고 외치자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그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미워하여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 후부터는 “우리 임금님은 귀가 길다”는 소리가 났다.
당나귀 귀는 우스꽝스러운 소인에 가깝고 큰 귀는 귀인(貴人)의 형상으로 여겨졌으니 왕으로선 다행이었다. 물론 과학적으론 말이 안 되는 얘기다.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재위 14년 동안 세 차례의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권력이 불안정했다. 따라서 이 설화는 당시 정치상황에 대한 은유라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삼국유사에 담긴 비밀의 코드를 저자와 함께 추리해가는 과정이 신선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과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안에 온갖 인간사의 은유와 상징이 담긴 것과 비슷한 이치다. 삼국유사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원전을 읽기 전에 길잡이로 삼을 만한 책이다. 책을 들고 옛 백제와 신라 지역을 여행하면 잊혀진 왕릉이나 쓸쓸한 절터도 달리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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