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들여다보다… 박진성 시인의 첫 산문집 ‘청춘착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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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4일 03시 00분


공황장애와의 16년간 싸움을 기록

발작은 갑자기 찾아왔다. 대학 진학을 앞둔 고교 3학년 때인 1996년 2월 22일 자율학습 시간에 들이닥친 호흡곤란, 마비감, 비현실감. 승합차 뒷좌석에 앉아 병원 가는 길. 마비되어 가는 팔다리, 가슴을 주먹으로 계속 쳐댔다.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깨어났을 때 의사는 호흡곤란과 어지럼증이 수시로 발작하는 ‘공황장애’란 진단을 내렸다. 이후에도 예측할 수 없이 울려대는 몸속 경보와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땀에 절었다. 고려대 서양사학과에 진학했지만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뒤 대전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성복 기형도의 시집 속에서 자신의 병과 같은 불안과 공포의 심연을 읽었다. 병(病)과 시(詩)는 일그러진 거울의 앞뒷면처럼 닮아있었다. ‘미친 듯이’ 시를 썼고 2001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 ‘목숨’과 ‘아라리’를 펴냈다. 박진성 시인(34·사진)이 그다.

‘귓속으로 기차가 들어왔다/기차는 며칠째 철로를 달리고 있다/파도가 칠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귀,/해안선이 일제히 내 안으로 휘어진다/기차는 귓속을 뚫고 관자놀이 지나/심장까지 온다 바퀴 소리가 온 몸의 혈관을 달군다.’(시 ‘이명’의 일부)

박 시인이 첫 산문집 ‘청춘착란’(열림원)을 펴냈다. 즐거운 여행이나 달콤한 일상을 다룬 산문집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의 기록이다. 생과 사, 현실과 비현실을 오갔던 16년 동안의 발악이다. 병 못지않은 고통의 시업(詩業)을 왜 택했을까. 청춘착란엔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가 열렬하게 앓음으로써, 그 누구를 구원할 수 있겠다는, 그러니까 ‘당신-대신’ 내가 아프고 싶다는 어떤 구원받은 자의 소명 같은 것 때문이었다. 시는, 여전히, 치유였고, 위로였고, 이상한 종교였다.”

하지만 시는 그에게 ‘구원’만은 아니었다. 문학적 완결성과 진정성이 이번에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화계사 은행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몇 년 동안 썼던 시를 모조리 찢어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인은 어렴풋이 깨닫는다. 궁극적으로 병은 ‘내가 아픔’을 통해서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구멍이라는 것을. 혹은 그러한 아픔이 온전히 만날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혼융 상태라는 것을.

박진성의 산문은 술술 읽히지 않는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날선 단문들이 바늘처럼 콕콕 찔러댄다. 하지만 그의 첨예한 각성의 정신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과 문학에 대한 따스함이 기저에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채찍질한다. “더 지치기 전에,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잃기 전에, 나는 자꾸만 더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처연하나 결연한 글쓰기에 대해 시인 박형준은 이런 추천글을 보탰다. “이 책은 아픈 한 영혼이 세계의 아픈 영혼들에게 사랑과 연대로 나눠주는 씨앗이다. 우리가 영혼을 다치기 쉬운 날엔 길에서 집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하리.”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박진성 시인#산문집#청춘착란#공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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