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동로면의 8월은 오미자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동네 어귀마다, 주변 산의 골짜기마다 포도송이를 닮은 오미자 열매가 예쁜 자태를 뽐낸다. 동로면 일대는 대미산과 황장산, 천주봉 등 해발 1000m 내외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싼, 움푹한 분지 마을(해발 300∼400m)이다. 이 분지 일대가 전부 오미자 밭이다. 이 오미자들은 9월이 되면 선홍빛으로 물들어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문경은 전국 오미자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곳이며, 특히 동로면은 오미자 특구로 지정될 만큼 유명하다. 무려 900여 농가가 오미자 농사를 짓고 있다.
○ 며칠 만에 없어진 길
19일 오후 4시, 기자는 문경과 예천의 경계를 이루는 야산의 임도를 오르고 있었다. 경운기나 올라갈 수 있을 듯한 급경사에서 준중형 승용차가 힘든 신음을 쏟아냈다. 비포장도로는 메모가 어려울 정도로 험했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글씨가 춤을 췄다. 잠깐 만에 멀미가 났다.
‘송이채취 구역, 무인카메라 감시 중’이란 팻말 앞에 차가 멈췄다. 여기서 다시 500m 정도를 더 걸어가야 한다. 사륜구동차만 통행이 가능하단다. “며칠 아래쪽으로만 다녔더니 길이 사라졌네.” 앞장선 이원규 씨(42)가 말했다. 차바퀴 자국을 제외하고는 잡초로 가득한, 때론 바퀴자국마저도 사라진 길에서 그가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원래 무역회사에 다니셨어요. 전 세계를 돌며 의류 제조와 판매 일을 하셨죠.”
한때는 연간 취급액이 1억 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후 독립해 무역회사를 열었다.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던 사업을 접고 은퇴한 것이 2006년경. 손주들 재롱을 보며 행복한 노년을 즐기던 아버지는 잠시 문경에 다녀오겠다며 떠났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두 아들은 당혹스러웠다. 혹시 가족들에게 뭔가 크게 서운한 것이 있지 않나 걱정도 했다. 아버지를 찾아 난생처음 문경으로 간 두 아들은 기가 막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시커먼 얼굴로 나타난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여기서 남은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 아들의 눈물
두 아들은 설득을 계속했다. ‘오미자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생각에 오미자 밭을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런 가족들에게 애써 오미자 밭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문경에 내려온 지 3년이 흘렀다. 마침내 아들들은 백기를 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참 만에 찾아온 둘째 아들(원규 씨)을 사륜구동 트럭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산속 깊은 도로를 내달리다 포장도로가 끝난 지점에서 한참 동안 더 차를 몰았다. 어느 산모퉁이를 돌자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골짜기를 따라 펼쳐진 1만 평(약 3만3000m²)의 오미자 밭. 한눈에 봐도 원래부터 있던 밭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곳은 지목만 밭이었지 20년 이상 버려진 땅이었다. 숲과 밭의 경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무와 칡넝쿨, 바윗덩어리를 치우던 포클레인 기사들은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자동차와 트랙터가 뒤집히는 사고를 겪으며 아버지는 손수 오미자 밭을 일궈낸 것이었다. 아들은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제가 마음을 열고 나니 아버지가 할아버지 말씀을 하시더군요. 충남 공주에서 약재상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4남 1녀 중 누군가가 가업을 물려받길 원하셨대요. 그런데 무역에 재미를 붙인 아버지를 비롯한 자식들 중 누구도 할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장남인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셨다고 합니다. 그게 아버지 마음에 큰 응어리가 된 것이었죠. 할아버지 소원이 몸에 좋은 오미자를 대량으로 재배해 보급하는 것이었대요.”
○ 개구리 가득한 오미자 밭
9월 한 달 동안 동로면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오미자 수확 때문이다. 이 한 달 동안은 문경은 물론이고 상주, 예천에서도 ‘일손 구하기 전쟁’이 벌어진다. 너무 바빠 다른 작물처럼 이웃끼리 품앗이를 하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사람 값’이 오르니 미리 일꾼을 섭외해 놓는 것도 모자라 승용차로 모셔오고 퇴근까지 시켜줘야 한다.
오미자는 우리나라 자생식물이며 서늘한 고지에서 자라 병충해가 적은 편이다. 농약을 치기는 하지만 그 양이 많지 않다. 덕분에 이 씨 부친의 농장에는 개구리(오른쪽 사진)가 득실득실했다. 개구리가 많으니 뱀도 많다. 놀란 새끼 살무사가 사진기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다만 자생종을 거의 그대로 키우다 보니 품종이 고정돼 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각각의 덩굴이 조금씩 다른 형질을 가지고 있다. 덩굴마다 수확량도 다르고, 열매가 익는 시기도 다르다. 한 밭에서도 여러 번 나누어 열매를 거둬들여야 한다. 그래서 수확할 때 매우 손이 많이 간다. 수확 시기를 일정 기간에 집중시킨 신품종이 나와 있긴 하지만 아직 일반 농가에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다.
최근 들어 오미자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지난해 문경 오미자 축제 때는 준비한 오미자가 떨어지자 일부 관광객이 농민들의 창고 앞에서 “물량을 더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단다. 농민들은 그들을 진정시키려 밭으로 ‘긴급 출동’을 해야 했다. 올해 오미자 축제는 9월 14∼16일 문경 동로초등학교 일원에서 열린다. 문경의 농민들은 현재 인터넷으로 오미자 생과 예약주문도 받고 있다.
원규 씨와 형 종규 씨는 2010년 봄부터 아버지의 농사를 돕고 있다. 중소기업 이사(원규 씨)와 무역회사 사장(종규 씨)이란 자리를 내놓고서다. 아버지 이효일 씨(72)는 자신과 두 아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빼내 농장 이름을 ‘효종원’으로 지었다. 요즘 동로면에는 이들처럼 서울에서 귀농해 오미자 농사를 짓는 사람이 10여 명 있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가시거든 오미자가 얼마나 몸에 좋은지 써 주시고, 미흡하지만 제가 여생을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보낼 거란 점을 강조해 주세요.”
검게 그을린 얼굴의 이효일 씨가 20일 서울로 떠나는 기자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무역 일꾼’ 출신 농부의 모시 적삼은 밭을 돌아보느라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기자가 떠난 후에도 ‘오미자와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이 씨는 취재 내내 “작물과 말이 통하면 피곤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 오미자는 덩굴 식물
오미자(五味子)는 글자 그대로 다섯 가지 맛이 나는 열매다. ①시고 ②달고 ③맵고 ④쓰고 ⑤짠맛이 난다. 그중에서 특히 신맛이 강하다. 기자가 이 씨의 밭에서 먹어본 약간 덜 익은 오미자는 매운맛이 많이 났다.
오미자는 예부터 피를 맑게 하고 혈압을 내리며 기침과 천식을 다스리는 약재로 쓰여 왔다. 의학계의 최근 연구 결과에서도 오미자에 들어 있는 약효 성분에 면역기능 활성화와 항산화, 항고혈압, 항동맥경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미자는 덩굴 식물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며 자란다. 재배를 하기 위해서는 지주대를 세워 덩굴이 타고 오르게 한다. 신기하게도 꼭 왼쪽으로만 덩굴을 감아줘야 한다. 씨앗을 심은 지 3년차부터 열매 수확이 가능하다. 처음 오미자 농사를 시작한 사람은 열매 수확이 가능해질 때까지 아무런 수입 없이 버텨야 한다. 이것이 귀농인들을 비롯한 오미자 농사 초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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