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서울 안국동 카페 ‘아리랑’ 사장겸 가수 최은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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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5일 03시 00분


“오빠는 풍각쟁이야∼ 10명 오면 꽉차는 객석서 1930년대 노래 들어보세요”

최은진 씨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감성의 꽃을 피우면 좋겠다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최은진 씨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감성의 꽃을 피우면 좋겠다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참 멀리도 돌아왔다. 아니 아직 다 온 것도 아니다. 최은진 씨(52)는 지금까지 음반을 두 장 낸 가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가수인지 잘 모른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헌법재판소 남쪽 담벼락을 따라 난 골목길, 작은 카페 ‘아리랑’이 그의 무대다. 2004년 혼자서 20일 동안 인테리어 작업을 하고 문을 열었다. 해가 지고 10명가량이 옹기종기 앉을 수 있는 공간에 손님들이 들어차면 그는 마이크를 잡고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다. 1938년 원곡을 부른 가수 박향림 뺨치는 음색이다. 2010년 비트볼뮤직그룹에서 낸 앨범 ‘풍각쟁이 은진’의 두 번째 수록곡이다.

○ 돌고 돌아가는 길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가는데 동인천역 옆 ‘별 전파사’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몸이 붕 뜨는 것 같았어요. 가방 멘 꼬마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곡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질 못했어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였다. 그 뒤로 그의 가슴 한구석에 가수의 꿈이 생겼지만 이름을 건 첫 음반을 내기까지는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잠시 인천의 한 연극단 창단 단원으로 있다가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고교생 때 빠져들었던 신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픈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실망 등이 겹쳐 중도에 그만뒀다. 이후 이런저런 일을 하다 서른 즈음 극단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연극 ‘오구’, ‘산씻김’에 출연했고 그림자극과 인형극을 하는 극단에서 장구를 치기도 했다. 연극판에서는 노래 잘하고 잘 논다고 이름도 좀 알려졌다. 남자를 만나 애를 낳고 살림을 하다 타고난 끼를 주체하지 못해 다시 무대로 나온 것은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던 해다.

“1999년에 케이블TV 현대방송에서 ‘슈퍼 보이스탤런트’ 대회를 했어요. 성대모사 경연이었는데 신문을 보고는 아무도 모르게 나갔어요.” 1분에 걸쳐 가수 양희은 씨, ‘뽀빠이’, 아동 TV극 ‘텔레토비’의 보라돌이 등을 흉내 내 우수상을 받았다. 대상은 배칠수였다. 당시 사회를 맡은 임성훈 씨가 그를 보고 “예사 인물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했단다.

이후부터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4개월 동안 주변에서 모은 일회용품 쓰레기를 줄에 꿰어 명성황후 복장을 하고 민속박물관 앞에서 끌고 다니는 환경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재즈카페 ‘클레’에서는 ‘개발새발 아리랑’이라는 노래와 연극을 합친 1인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접한 것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불린 각종 아리랑 노래였다. 복각된 아리랑을 자신의 목소리로 불러 ‘아리랑 소리꾼 최은진의 다시 찾은 아리랑’이라는 음반을 신나라레코드에서 냈다. 1930년대와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 ‘여성 장사익’

카페 ‘아리랑’에는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오는 손님이 꽤 있다. 주로 신청하는 곡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오빠는 풍각쟁이’다. 20여 년 전, 한 방송사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다시 소개된 이래 간혹 코미디언들이 콧소리를 내며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하고 불렀던 노래다. 그도 그렇게 알게 된 이 노래가 처음에는 마뜩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의 음반을 들어보고는 그 시절 노래들에 흠뻑 빠지게 됐다.

“원곡의 연주를 들어보면 정말 재즈예요. 1930년대 조선의 가요계는 당대 전 세계의 음악을 모아 ‘르네상스’를 이룬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생각해요. 작곡가 김해송 박시춘 같은 분이 정말 천재적으로 재즈를 자기화한 거예요.” 우리 옛 노래라고 해서 무작정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성 때문에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1930년대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더니 가게를 찾는 손님 가운데 음반 제작자나 가요계 종사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수 하림의 권유로 2008년에는 가수 강산에 이상은 등과 함께 ‘천변풍경 1930’이라는 콘서트도 했다. 그리고 2010년 한국 가요를 사랑해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프로듀서 겸 연주인 하치와 함께 ‘풍각쟁이 은진’을 제작했다.

이 앨범에는 최은진 씨가 선정한 1930년대 만요(漫謠·만담풍의 재미있는 가사를 담은 노래)를 비롯해 13곡이 담겼다. ‘오빠는 풍각쟁이’는 신랑에 대한 얄미움을 담은 새색시처럼, ‘파리춘몽’은 당시 기생의 애환을 담아서, ‘다방의 푸른 꿈’은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에 앉은 인텔리겐치아들을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그는 여성 장사익이라고 불릴 만하다. 우리의 정서와 애환이 담긴 노래를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으로 훌륭하게 소화해 냈고, 둘 다 마흔이 훌쩍 넘어 가수로 데뷔했다. 다만 대중의 인기라는 점이 둘을 갈라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뤘기 때문이다. 바람이 있다면 그의 노래에 취해 “자네는 국보야, 계속 노래 불러야 해”라거나 “여기는 없애면 절대 안 된다”고 하던 손님들이 말로만 그치지 말고 계속 좀 찾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뜸한들 어떠랴. 그는 계속 노래할 운명일진대.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최은진#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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