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실수를 하고 신은 용서를 한다”라는 서양 속담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 실수의 대상이 신의 고유 영역, 곧 생사의 문제라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실수를 곧 신의 용서로 대체해버려도 되는 걸까.
26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대학로 코미디페스티벌 참가작으로 공연된 ‘유쾌한 하녀 마리사’(천명관 작·김한길 연출)는 분명 창작극인데 무대는 독일이다. 사실 독일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라도 상관없다. 유명작가 토마스(이창훈)의 아내 요한나(서정연)는 부부싸움을 하고난 뒤 작품 취재차 출장을 간 남편이 묘령의 여인과 바람이 났다는 것을 눈치 챈다.
포르투갈 출신 하녀 마리사(이은)의 조언을 받아 남편의 전화번호부에 적힌 여자들 명단 중에서 의심 가지 않는 이름부터 지워가다 단 하나의 이름만 남겨둔다. 요한나도 의식하지 못했던 그 이름은 요한나의 여동생 나디아(권귀빈).
청천벽력 같은 진실에 눈뜬 요한나의 선택은 뜻밖에도 자살이다. 자신의 전생이 로마 네로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인 탓에 그 악행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므로 그 죗값을 자신이 치르겠다는 것이다. 요한나는 남편이 돌아오는 날 이런 취지의 편지를 남기고 독약을 탄 샴페인을 마신 채 욕실로 들어간다.
귀가한 남편은 아내가 편지 앞에 적은 대로 냉장고 안에 든 샴페인을 마시며 나머지 내용을 마저 읽고는 쓰러진다. 그리고 욕실 안에서 벌써 숨져 있어야 할 요한나가 걸어 나온다. 오지랖 넓은 마리사가 얼떨결에 요한나와 토마스의 샴페인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 연극의 원작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작가 천명관이 직접 희곡으로 옮긴 연극은 여기서 토마스의 시신 처리를 놓고 또 다른 블랙코미디를 펼친다. 소설에선 잠깐 언급되고 지나친 인물도 살아난다. 남자를 밝히는 나디아는 죄의식 많은 여동생으로 둔갑한다. 참치잡이를 하다 죽은 마리사의 큰아들은 마리사의 ‘마초’ 오빠 파울로(박주형)로 부활한다. 그리고 소설 속 중늙은이에서 젊은 처녀로 탈바꿈한 마리사의 맹활약이 시작된다.
소설에는 인간세상을 움직이는 어수룩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위트가 번뜩인다. 연극에서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본성에 더 투철한 것 아니냐는 야유가 읽힌다. 기독교적 죄갚음이나 불교적 윤회를 말하며 비극적 자기희생을 택하려던 요한나와 나디아 같은 ‘병든 문명인들’이 마리사와 파울로 같은 ‘건강한 야만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만다.
시나리오 작가에서 소설가를 거쳐 극작가로 등단한 천명관의 이력에 걸맞게 연극에는 영화적 요소가 많다. 요한나와 토마스가 다른 시간, 같은 공간을 유영하도록 한 무대연출은 영화의 오버래핑 기법을 연상시킨다. 영화 ‘달콤살벌한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카니발리즘적 웃음코드도 그렇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과 다른 연극적 특징으로서 죄의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빠진 점은 아쉽다. 정말 우리 인간의 실수가 신의 용서를 대신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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