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배우 이순재, 아버지 이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일 03시 00분


[내 인생을 바꾼 순간]“순재야, 뭘하든 최선 다하면 밥은 먹지 않겠냐”

이순재에게 연기는 매번 예술적 독창성과 창조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7일부터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시작되는 연극 ‘아버지’의 무대에서 그가 아버지로 변신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이순재에게 연기는 매번 예술적 독창성과 창조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7일부터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시작되는 연극 ‘아버지’의 무대에서 그가 아버지로 변신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낮 공연에는 급기야 객석보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출연료를 받을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저녁 공연을 준비하는데 누군가 면회를 왔다고 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가 대전에서 올라오셨다. “이거 꼭 해야 되겠냐?”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으니까 막막하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뭘 하든지 최선을 다하면 밥은 먹지 않겠냐.” 아버지는 용돈을 손에 쥐여주고 내려가셨다. 1960년, 제대 후 다시 연극판에 뛰어든 아들 이순재(78)는 이제 마음 놓고 연극을 할 수 있었다.

○ 예술

“하하하!”, “아∼악”, “엉엉…”. 분명 미친놈으로 비쳤을 것이다. 1956년 여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빈 강의실에서 이순재는 9시간째 울며 웃으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다. 처음 무대에 오르는 작품에서 60대 노역을 맡은 그였다. 한번 웃어보라는 지시에 며칠째 몇 번이고 시도해 봤지만 연출자는 냉랭했다. 화가 난 연출자는 대본을 찢고 나가버렸다. 그래서 끼니도 거르며 목청이 트이게 하려고 악을 써댄 것이다.

“다음 날 연출자한테 가서 ‘할까요?’ 했더니 ‘해 봐’ 그러더라고. 웃는 연기를 해보였더니 ‘됐어’ 하더라고. 잘했다는 거지.”

서울대 철학과 54학번인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전후(戰後) 황량한 서울의 극장에서 그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들인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시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빠졌다. 프랑스 대가 쥘리앵 뒤비비에, 르네 클레르의 작품에 심취했고, 미국의 명감독 윌리엄 와일러의 것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즐겼다.

누구보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영국의 대(大)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경(卿)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스카라 극장에서 그가 주연한 ‘리처드 3세’를 하루 종일 거듭해 보던 이순재는 생각했다. ‘저건 예술이다.’ 연기란 게 그저 연예·오락적인 개념만이 아니었다. 몸의 행위가 창조적인 예술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정말 해볼 만하구나. 내게 가능성이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하구나.’ 막연한 기대일 수도 있었지만 그를 무대로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했다.

과 후배인 김의경(76·극단 현대극장 대표)과 주춤하던 서울대 연극부를 통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연기 스승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주의 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이론서인 ‘배우수업’ 일본어판을 구해다 번역해 가며 공부했다. 당시 국내에는 연기에 관련한 책 한 권 변변히 없었다. 단어의 장단(長短), 높낮이를 익혀 정확한 발성을 하기 위해 연습 때는 꼭 국어사전을 가져다 놓고 했다. “연기에도 철저한 객관성을 추구하자. 그걸 원칙으로 삼은 거죠. 그러니까 연기가 어느 아류로 흐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과 의지, 그리고 노력은 충만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연극배우는 미래가 불확실했고 사회적 인식은 바닥이었다. 그는 불안했다.

○ 자존심


1960년대 전망이 좋은 직종은 크게 4가지였다. 은행원, 법관 또는 공무원, 교수, 의사. 누구나 선호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았다. 문제는 군에서 제대한 그가 그것들을 준비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고시 공부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가 반기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연극의 맛에 살짝 오염된 상태였다.

“대단히 불안했지요. 하지만 ‘아이고, 이제는 이것밖에 없다’는 심정이었어요. 죽어라 하고 해보자. 그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목적한 바는 이루지 않겠느냐는 확신이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굶는 한이 있어도 모험을 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 거예요.”

장가가기도 쉽지 않은 직업을 천직으로 택한 것이다. 1960년대 초반 그가 KBS의 드라마에 얼굴을 비칠 때였다. 그의 어머니가 이화여대를 나온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선을 보게 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TV 방송국에서 일한다고만 듣고 나온 여성은 호감을 보였다. 그런데 그 여성의 부모님이 드라마에 나온 그를 알아본 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배우면 어떠냐는 그의 말에 그 여성은 “배우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생활의 절제가 없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가 극단에서 연기 생활을 할 때 선배 배우가 후배들한테 흔쾌히 짜장면 한 그릇, 커피 한 잔 사주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름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이었는데도 그랬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알았지. 대배우라고 해도 연극으로 돈을 벌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인색한 게 아니라 여력이 없었던 거요.” 또, 이른바 딴따라 판에서 조강지처와 잘 살아가는 사람도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런 전례들이 배우를 배우자로서 기피 대상이 되게 했다.

소위 순수예술을 한다는 사람들도 배우를 한낱 광대 정도로 취급했다. 그가 동양방송(TBC)에서 드라마를 찍을 때였다. 화실(畵室) 촬영을 위해 한 화가의 작업실을 빌렸다. 그 화가의 부인이 허락을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찍는 도중 들이닥친 화가는 “이런 젠장, 어디서 딴따라들이 감히…” 하면서 그들을 내쫓았다. 이순재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연기는 예술이라는 확신과 자존심이 그를 지탱했다. “연기도 창조적 조건을 가진 예술적 행위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토록 험난한 길을 앞에 둔 20대 후반의 그에게 아버지의 “밥은 먹지 않겠느냐”는 한마디는 연기에 전력투구하도록 하는 힘이 됐다. 광복 후에 뒤늦게 월남한 아버지는 피란 내려간 대전에 정착해 작은 비누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연기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져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터다. “이후로 연극을 하게 되면 아버지께 초대권을 보내드렸어요. 와서 보시라고. 물론 오실 때 용돈도 좀 가져오시라는 뜻도 있었지만. 허허.”

○ 소신


이순재는 연기를 시작한 이래 특별히 좌절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무슨 욕심을 내는 연기자는 아니기 때문이지.” 물론 그라고 작품에서 빛나고 뛰어나야겠다는 욕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남의 배역을 빼앗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상복(賞福)도 없다. 연극 TV드라마 영화를 130편 넘게 했지만 연극계 최고 권위 동아연극상에서도, 각 방송사 연말 연기대상에서도, 영화계 대종상에서도 남우주연상을 탄 적이 없다. 1960년대 후반 한 신문사의 영화담당 기자인 대학 선배가 유력 후보인 그에게 제안을 했다. 심사위원장에게 로비를 하면 대종상을 탈 수 있다는 거였다. 그는 “선배, 우리가 누구요? 명색이 서울대 나온 사람 아니오” 하며 거절했다.

연기 생활 50여 년을 그는 ‘연기는 예술’이라는 소신과 자존심으로 돌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점도 안 보고 종교도 없다. 복권도 사지 않는다. “나는 요행을 믿지 않습니다. 타율(他律)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온전히 그 자신이었다.

[채널A 영상]이순재의 ‘돈키호테’는 어떤 모습일까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이순재#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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