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꿈’ ★★★★
조신지몽 설화와 춘원 이광수의 닮은 듯 다른 비극… 아! 삶의 무상함이여
국립극단이 야심 차게 기획한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놀랍게도 한국사회의 해묵은 금기어를 꺼내들었다. 바로 ‘친일’이다.
친일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압도적 시각은 ‘개인적 입신양명을 위해 민족이란 대의명분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준엄한 역사적 단죄’의 관점이다. 광복 이후 친일인사를 과감히 처단하지 못했기에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했고 부정부패가 판을 치게 됐다는 시각이다. 이를 비판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일제강점기 복잡다단했던 현실을 망각 내지 간과한 채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으로 마구잡이 재단을 가하는 것은 ‘나중에 태어난 자의 특권’을 남용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춘원 이광수(1892∼1950)와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친일의 문제를 풀어 가는 데서 우리 민족의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다. 2·8 독립선언문과 3·1 독립선언문의 집필자이자 한국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두 사람이 훗날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들의 참전을 독려한 친일파로 전락한 것은 이것이 강렬한 민족적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춘원의 문제를 다룬 수많은 극작품들은 그를 민족적 지조를 지키지 못한 비겁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그려왔다. 여기서 그는 곡학아세를 일삼는 기회주의자로서 한국적 지식인상의 대명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꿈’(김명화 작·최용훈 연출)에서 그런 역사적 윤리적 단죄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그 대신 근대라는 거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죄로 자신이 출발했던 항구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히 저주받은 바다를 떠돌아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형상화된다.
연극은 강원 양양 낙산사라는 하나의 공간을 무대로 3개 층위의 이야기를 겹쳐 놓는다. 첫째는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의 설화다. 둘째는 그 설화를 소설 ‘꿈’(1947년 발표)으로 집필하는 춘원 이광수의 이야기다. 셋째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과 두 번이나 관음보살을 만나보고도 못 알아본 원효의 설화다.
해방정국에서 친일변절자라는 비난에 시달리던 춘원(강신일)은 문우(文友) 육당 최남선(남명렬)의 권유로 ‘꿈’을 쓰면서 조신(장재호)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조신이 태수의 딸인 월례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승려의 계율을 깨고 야반도주했듯이, 춘원 역시 상해임정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최초의 여의사로 유명했던 허영숙과 결혼하기 위해 조선행을 택한다. 조신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만 그 대가로 비극적 파멸을 맞게 된다. 춘원도 일제 통치하의 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 협력이라는 치욕적 죄를 짓고 역사의 판결대에 서는 운명을 맞게 된다. 조신과 춘원의 욕망은 붉은 꽃으로 형상화되고 이는 다시 월례와 허영숙의 1인 2역을 맡은 여배우 김수진으로 등치된다.
조신의 비극은 한바탕의 꿈으로 귀결되지만 춘원의 비극은 현실의 악몽으로 찾아온다. 춘원은 꿈속에서 자신의 변절을 비난하는 젊은이를 만나 “나에게 아무 것도 베푼 게 없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건만 돌아온 것은 민족의 변절자라는 비난뿐”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다름 아닌 젊은 날의 자신임을 깨닫고 주저앉고 만다.
그렇다. 조신은 꿈이라는 가상현실을 통해 욕망의 허망함을 깨친다. 반면에 춘원은 실제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실천했던 ‘근대적 욕망의 실현’이 초래한 윤리적 책임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소설을 끝마친 춘원은 이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보여준다. 육당에게 “우리가 조선 근대의 첫 단추겠지, 잘못 끼워진”이라는 말을 건넨 그는 아내 허영숙에게 꽃을 바치며 말한다. “수치스러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가주겠소?”
연극은 고대설화의 해피 엔딩에 의존하지 않는다. 근대적 욕망이 초래한 윤리적 파멸의 책임을 끝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이 진짜 인간의 길임을 역설한다. 번번이 욕망의 덫에 걸려 넘어졌던 원효과 달리 한없이 지고지순했던 의상이 자신에 대한 사모의 정을 이룰 수 없어 용이 되어버린 선묘낭자를 부둥켜안는 장면이 말하는 것도 같다.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처럼 번뇌가 곧 별빛이러니. : : i : : 16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1만∼3만 원. 1688-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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