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스레 목줄을 타게 만든 올여름, 수십 년 만의 장작불 무더위에 꽤나 지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굼뜬 꼬리를 늘어뜨려 미련이나마 남기려던 무더위는 태풍 ‘볼라벤’의 벼락같은 고함에 놀라 저만큼 사라졌습니다. 뒤를 이어 며칠간 온 땅을 적셔준 빗줄기 탓인지 이제 제법 숨이 트일 만한 날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계절 가을이 이제 찾아온 것이지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에 얹혀 오는 선선한 기운이 마냥 부드럽기만 합니다. 한낮의 높고 푸른 하늘색은 어디론가 떠나 온몸 가득 가을을 느껴보고 싶게 합니다. 회색빛 도시 안에 그냥 머물러 있는다면 속 좁은 게으름뱅이로 보이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되기도 하고요. 가을 햇살을 품은 바람소리에 코끝이 시큰거리고 귓속이 윙윙 울리니 어디든지 바깥나들이 한번 나서야 할 것 같은 요즘입니다. 어떠신지요? 저만의 생각은 아니겠지 싶어 유혹을 해봅니다.
○ 감성을 믿고 셔터를 누르자
1년 만에 찾아온 가을과 만나는 길이지만 이번 나들이는 혼자만의 걸음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가족이나 지인, 친한 친구고 뭐고 잠시 잊고 홀로 나서는 짧은 가을여행을 해보는 거죠. 같이 다니다 보면 수다도 떨어야 하고 끼니로 뭘 먹을지도 이야기해야 하고 어디로 갈지도 정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의견이 분분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홀로 나서 가을과 단둘이서만 데이트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준비할 게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가볍고 착용감 좋은 옷차림에 걷기 편안한 신발은 기본이겠지요. 모자와 선크림도 필요하겠고, 물통 하나쯤 챙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집 안 어디엔가 있을 카메라도 꼭 챙겨봅시다. 모처럼 나서게 될 가을맞이에 카메라가 없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가벼운 걸음으로 나서는 길, 선글라스는 집에 살짝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햇살이 따갑긴 하지만 가을이 전해주는 풍경을 굳이 검은 막을 치고 바라볼 일은 아닌 것 같거든요. 선글라스를 벗고 가을이 주는 색색의 빛 잔치를 온전히 즐기려는 마음가짐으로 집을 나서는 게 한결 낫겠지요.
자, 그럼 이번 가을맞이의 주제를 ‘홀로 맞이하는 가을 사진여행’이라고 정해 봅니다.
카메라는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커다란 렌즈가 장착된 비싼 디지털렌즈교환식(DSLR) 카메라 정도 들어야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어떤 사물과 대상에 마음이 가는지를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찾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는 사물이나 대상이 정해지면 그것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뜬구름 잡는 얘기 같을지 모르지만 사진은 기술보다는 자신만의 시각적인 관점을 뚜렷이 갖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사진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미적 감성이 드러날 수 있는 사진을 ‘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작가’이지요.
일반 자동카메라를 쓰거나 속칭 ‘폰카’를 활용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감성을 믿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득 담아 시작하시면 됩니다. 이번 가을맞이 사진여행을 통해 사진을 잘 ‘찍는’ 것보다는 사진을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초보자라며 자기를 낮추는 소심함으로 자신의 내적 감성을 찾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바보짓이랍니다.
○ 천천히… 깊게… 느리게 담아요
모든 준비가 끝났으면 대문을 열고 길에 나서 봅시다. 집에서 나가는 순간 이미 가을과 몸을 섞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왕이면 도심 바깥으로 나가 가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이날 ‘하루’와 완전히 밀착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 나가 떠오르는 햇살과 하루의 시작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한적한 숲길을 찾아갔다면 아침 햇살에 나무 잎사귀마다 일렁이는 생기도 느껴보고 그 빛의 찬연한 어우러짐도 살펴보세요. 그때부터 진짜 가을과의 조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보려 하지 말고 남아 있는 다른 감각도 깨워 봅시다. 눈을 감고 산새들의 울음에, 벌레와 곤충들의 어슬렁거림에, 바람결에 맞닿아 울리는 바스락거림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겁니다. 신발과 양말도 벗어 옆으로 치워 볼까요. 맨발로 흙과 잡풀들을 부드럽게 딛고 서서 온 신경을 모아 봅니다. 자연의 피부와 자신의 살갗이 닿아 일어나는 촉감이 어떤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마음이 가는 무엇이든 누르거나 만져보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코도 가만히 놔둘 수 없지요. 큰 호흡으로 자연이 잠에서 깨어 내뿜는 온기들을 맡아 봅니다.
‘천천히’ 바라보고 ‘깊게’ 받아들이면서 ‘느리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 순간이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입니다. 스치듯 한 번에 모든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느린 몸짓으로 서서히 가을과 하나가 돼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다가가 무례하게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나를 받아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여유를 두고 하루의 소임을 다한 태양이 저만치 기울어 가는 시간까지 함께해 봅시다. 홀로 떠난 가을맞이지만 외로울 일이 없습니다.
여름의 혼잡함이 사라진 가을바다로 떠나는 것 역시 좋습니다. 넓은 모래밭에 서서 자신의 오감을 일으켜 세워 가을을 온전히 느껴 봅시다. 자신이 서 있는 곳과 하나됨의 시간이란 무엇인지를. 벼이삭이 누렇게 변해가는 가을 들녘이든, 온갖 과일들이 풍요로운 자태를 뽐내는 언덕자락이든 괜찮습니다. 자신에게 기쁨이나 슬픔으로 남아 있는 공간을 찾아가 특별한 추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어디에나 가을이 와 있을 겁니다.
당신이 찾아가 서 있는 자리. 그 자리에 가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치러야 할 일, 막아야 할 일 모두 내려놓고 지금 문을 열고 나가 보십시오. 사진은 대면의 도구입니다. 자신의 몸이 ‘그’ 앞에 놓여야 사진이 완성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닿을 때 사진은 비로소 참다운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진은 결국 자신과 만나는 깊은 통로와 다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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