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서 아침이면 맨해튼행 기차에 오르는 한국인 남자가 있다. 허름한 차림의 그가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계를 주무르던 영화 제작자 이승재 전 LJ필름 대표라는 사실을 아는 뉴요커는 없다. 그는 ‘잘나가는’ 한국 영화제작자로서의 보장된 삶을 뒤로하고 2006년 4월 맨해튼 첼시 거리에 LJ아메리카를 설립한 뒤 6년 넘게 미국 영화계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 멀록 여사와의 약속
이 대표는 이달 하와이에서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리. 요즘 힘들지 않아? 그런데 우리 얘기는 언제 영화로 나오는 거야?”
고령에 목소리마저 희미한 줄리아 멀록 여사(90)의 전화였다. 이 대표는 “거의 다 돼 가니 건강하셔야 한다”라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수십억 원의 사재를 쏟아 부으면서도 뉴욕을 떠나지 않은 것은 그녀 때문이다.
이 대표는 2005년 초 하와이의 좁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멀록 여사를 처음 만났다. 근현대사 속 엇갈린 러브스토리를 영화에 담기 위해 4년간의 수소문 끝에 그의 거처를 찾아냈다. 멀록 여사는 영친왕(英親王·고종의 아들·1897∼1970)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 이구(李玖)의 전 부인.
멀록 여사와 이구는 세계적인 미국 건축회사인 아이엠페이의 맨해튼 사무실에서 1957년 처음 만났다. 뉴요커였던 그녀는 이 회사의 잘나가던 직원이었고 이구는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학과를 졸업한 신입 직원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 이구는 멀록 여사에게 처음으로 춤을 청했고 두 사람은 1958년 10월 어느 비 오던 날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뉴요커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의 빈이 된 것.
처음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영화로 그려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에게 한국은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존재였다. 이구는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사실상 볼모로 잡혀있던 처지. 미국 유학을 떠났으나 광복 이후에도 한국, 일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회색인 신분으로 미국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랬던 그를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초대했고 창덕궁 낙선재에 조선 왕족의 신분으로 거주하도록 허가했다. 입국 당시 한국 언론은 대서특필했으며 멀록 여사는 뉴요커에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도 길지 않았다. 멀록 여사는 20년 만에 한국 생활을 접어야 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1982년 낙선재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이구와 이혼한 뒤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대표는 2005년 초 멀록 여사와 판권 계약을 맺은 뒤 그의 증언을 녹취하기 위해 서울 정동극장 앞 연립주택에 거처를 만들어 하와이에 있던 그를 한국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22년 만의 귀국길에 멀록 여사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구의 죽음과 마주치게 된다. 2005년 7월 16일 이구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석연찮은 죽음을 맞았다. 성대한 노제가 7월 24일 종로 거리에서 열렸다. 을사늑약(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조약) 체결 100년, 광복 60주년이 되던 해였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했던 멀록 여사는 종묘공원 앞 먼발치에서 떠나는 이구를 지켜봤다. 그는 거처로 돌아오면서 이 대표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은 나의 운명적인 또 다른 미스터 리(Another Mr. Lee)다. 하와이에 있었으면 그의 떠나는 길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를 만나 행복했느냐고 (이구에게) 물어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었는데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 대표는 “남편을 하늘에서 만나기 전에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답했다. 그의 인생을 바꿔 버린 순간이다.
○ 곧 이뤄질 것 같았던 뉴욕의 꿈
이 대표가 회사 설립을 위해 2006년 4월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을 때 초호화 리무진이 맞이했다. NBC유니버설의 자회사인 포커스피처스는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이 회사는 예술영화의 상업화를 모토로 거장 제임스 샤머스 씨(53)가 이끄는 영화제작사. 2006년 아카데미 영화제 감독상 등을 휩쓸면서 1억8000만 달러(약 2000억 원)를 벌어들인 ‘브로크백마운틴’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든 미국의 대표적 메이저 영화사다.
이 대표는 미국 도착 한 달 전 샤머스 대표를 맨해튼 포커스피처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멀록 여사의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와 사진첩을 들고. 3시간 동안 질문만 던진 샤머스 대표는 “새로운 소재이고 감동적이다. 아카데미 영화제도 노려볼 만하다. 계약하자”고 악수를 청했다. 50 대 50의 합작으로 3000만 달러를 투자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계약은 한국 제작사가 미국 메이저 영화사와 맺은 첫 합작 계약이다.
“계약만 맺으면 영화가 곧 나올 줄 알았죠. 여기서부터 나의 뉴욕 도전기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미리 알았다면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이 대표)
그를 좌절하게 한 것은 포커스피처스와 이미 계약을 맺은 영화만 수십 편이라는 점. 이 회사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창고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세계 영화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스케일이었다.
이 대표는 “7년간 뉴욕에 와서 뭐 했느냐고 물으면 수십 번째 순서를 이제 10번째 안으로 끌어당겼다고 얘기해야 할까”라며 웃었다. 샤머스 대표는 이 대표에게 글로벌 감각에 맞도록 시나리오 수정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렇게 6년 가까이 진행해 온 시나리오 최종본이 최근 마무리됐다. 이제 감독 및 출연 배우의 선정과 최종적인 투자자 모집을 진행하고 있다.
○ 베니스의 김기덕 감독을 보며
어찌 보면 그가 미국행을 선택하도록 한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현재 18번째 영화 ‘피에타’를 들고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수상을 노리고 있는 김기덕 감독이다. 김 감독을 사실상 키워 낸 것이 이 대표라는 데 영화계에서 큰 이견이 없다.
“2000년대 초중반 유럽 영화제에 김 감독의 작품을 출품하면 한국 영화의 저변을 세계 시장으로 넓힐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죠. 한국을 소재로 한 영화를 글로벌화하기 위해서는 미국 배우와 감독이 영어로 만든 작품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후보작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전까진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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