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제주 ‘갤러리노리’ 이명복-김은중씨 부부

“꿈에 그린 제주서 살게 돼 황홀… 미술관서 동심 뛰놀게 해 행복”

부부의 미소가 싱그럽다. 한 푼의 돈보다는 한 조각의 꿈을 좇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그런 행복한 미소다.

부부를 만난 건 약 두 달 전인 올해 7월이었다. “서울서 온 착실한 젊은이들”이라는 얘기만 듣고 찾아간 ‘갤러리노리(nori)’에서였다. 갤러리의 하얀 외관과 빨간 명패는 파란 잔디밭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었다. 1층 전시관 규모(230m²)는 그리 과하지도, 그렇다고 크게 모자라지도 않아 보였다. 한 중년 부부가 낯선 방문자를 반갑게 맞았다. 소개한 이가 아흔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충청도말을 쓰는 이 부부는 ‘우연’이 참 소중하다고 했다. 부부가 새 출발을 한 것도, 그리고 제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 것도 우연이었기 때문이다.

○ 제2의 ‘놀이터’를 찾아서

남편 이명복 씨(54)는 화가다. 5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갤러리메쉬’에서 14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중견 작가다. 1983년 MBC에 입사해 2009년 퇴직할 때까지 26년간 그래픽 디자인과 전시기획 등의 일을 했었다. 작가 활동은 직업과 병행했다. 회사와의 인연이 끝나갈 때쯤 그는 새로운 곳과 연이 닿았다. 제주였다.

2009년 5월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주세계자연유산 테마 특별기획전’에 참여한 게 시작이었다. 일정은 고작 1박 2일. 나이가 들어서였을까, 전업 작가로서의 새 출발을 앞두고 있어서였을까. 초행길도 아니었던 제주에 그는 흠뻑 빠졌다. 6월 회사를 나와 새 베이스캠프를 물색하던 중에도 머릿속엔 온통 제주 생각뿐이었다. 그리곤 ‘우연’이 겹쳤다. 그가 몸담은 민족미술인협회가 그해 8월 주최한 ‘제1회 미술인대회·평화미술제’가 하필 제주에서 열렸다. 개막 일주일 전 혼자 섬으로 향했다. 무작정 섬을 뒤졌다.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애착은 강해졌고, 결심이 섰다. 곧바로 아내 김은중 씨(50)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주로 가자.”

김 씨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고 했다. 대학시절 제주여행의 아련한 기억 때문이었단다. 애초에 은퇴하면 제주에서 살고 싶다던 사람도 아내였다. 남편이 그 꿈을 실현시켜주겠다고 선언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게 ‘당장’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 씨는 그해 9월에도 전시회 일정으로 제주에 왔다. ‘한국만화 100년 전(展)’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6∼8월)를 마치고 순회전시에 나섰는데, 첫 번째가 제주였다. 넉 달 사이 제주에서만 세 번의 전시회를 치른 셈이었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싶었다. 이 씨는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제주로 내려와 둥지를 틀 장소를 물색했다. 결국은 맨 처음 갔던 한경면 저지리의 예술인마을로 결론이 났다. 현대미술관 인근의 땅을 구입한 이 씨는 2010년 2월 완전히 ‘탐라사람’이 됐다. 그리곤 7월 첫 삽을 떠 12월 갤러리를 개관했다. SBS아트텍에서 근무하던 김 씨는 합류가 좀 늦었다. 막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진 자신이라도 벌어야 했으니까. 서울에서의 임무를 마친 김 씨는 지난해 11월 자신의 50번째 생일에 사표를 던졌다.

○ 제주 아이들과 ‘말’로 호흡하다

부부가 처음 만난 곳은 네덜란드의 스히폴 공항이었다. 2003년 가을 방송장비와 관련한 전시회를 참관하기 위해 막 입국하는 길이었다. 회사는 달라도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라 열흘간의 일정을 함께 어울렸다. 한국에 돌아와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부부의 인생2막은 그렇게 열렸다. 우연을 잘 다듬어 행복한 인연을 만들었다고 그들은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연히 연을 맺은 제주와도 더 나은 인연을 만들려 한다.

그중 하나가 말(馬)이다. 제주 하면 말이니까. 매년 5월 갤러리노리에서 여는 ‘말 전(展)’은 조금 특별하다. 이 씨를 비롯한 프로 작가들의 작품과 초등학생들의 그림을 함께 전시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한림초등학교, 올해는 금악초등학교와 함께했다.

내년 5월에는 갤러리에서 가장 가까운 저청초등학교와 작업할 예정이다. 아이들에겐 ‘내가 감히 갈 수 없는 곳’이던 미술관이 ‘내 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훨씬 가까워지는 기회다. 초등학교와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전시회를 통해 화가를 꿈꾸는 아이들이 실제 생겨나서다. 누군가가 꿈을 꾸도록 돕는 일이라면 참 행복하지 않겠냐고 부부는 반문했다.

갤러리노리는 지금까지 열다섯 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추상조각 1세대인 한용진 작가를 초청했고, 제주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원로조각가 조성묵 작가의 특별전도 열었다. 그라피티 전시회, 판화컬렉션, 독일 출신 수묵화가인 베르너 자세 개인전 등 독특한 행사도 많았다. 앞으로는 제주 작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에도 충실하려 한다.

“아직 제주엔 갤러리문화가 많이 성숙되지 않았어요. 저희가 육지와 제주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되겠죠. 하하하.”

사회적 통념상 50대 부부는 분명 ‘젊은이’가 아니다. 그러나 나이로는 속단할 수 없는 젊음이 그들에겐 있었다. 한두 차례 더 목소리를 주고받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제주=글·사진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