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김정일 동지. 기억나십네까? 저, 김일훈입네다. 1969년 동지의 명령으로 조직된 광명성 악단의 기타리스트 말예요. 이번에 남조선에서 나온 소설 ‘광명성 블루스 밴드’를 읽고 추억에 사무쳐 펜을 들었습네다.
저는 1967년 동독 유학에서 돌아온 뒤, 그곳에서 자본주의의 물질적 퇴폐를 청각적으로 표현한 재즈 연주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5년간의 노동교화형을 받고 탄광에서 하루 16시간씩 석탄을 캐던 로동자였습네다. 이런 절 1969년 ‘광명성 악단’에 발탁하고 로큰롤 음악을 하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네다.
동지께서 타파해야 할 서양 문화인 로큰롤 악단을 꾸린 것은,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의 깃발을 전 세계 젊은이들 앞에 드높이 치켜올리기 위함이었습네다. 그 배경에 동지께서 프랑스에 가 비틀스와 핑크 플로이드를 접하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는 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됐습네다. 우리는 서구의 사이키델릭 록, 스페이스 록에서 영향 받은 몽환적인 악곡 안에 프로파간다가 담긴 노랫말을 직조해 넣었습네다. 안드로메다에서 온 공산주의 외계인이 자본주의 망령에 물든 지구에서 주체사상이라는 완벽한 이념을 발견하고 이를 칭송한다는 가사. 북조선 각지에서 소집된 저희 악단원들은 평양 모처에서 합숙하며 연일 합주와 편곡으로 진군했지요. 세계 순회공연으로 서구 젊은이들 선동에 나선다는 푸른 꿈도 꿨습네다.
우리 얘기를 책으로 쓴 작가 양반은 남조선 기자더군요. 책은 2011년 남조선 백수 고진석이 일본에서 우연히 가져온 정체불명의 ‘광명성 악단’ 음반을 둘러싸고, 국정원과 북조선, 레코드 수집가인 저축은행 회장 김현수가 이를 손에 넣기 위해 벌이는 해프닝을 큰 줄기에 담고, 거기 광명성 악단의 탄생 배경과 북한 내 권력 암투까지 양념처럼 잘 버무렸더군요. 영국, 미국은 물론이고 동독과 일본 악단들과 그 음악적 특징까지 덧붙인 작가 동지의 노력에 경애를 표합네다.
책에서 보니, 묻힐 뻔한 광명성 악단의 데모 음반은 일본의 작은 음반사에서 재발매돼 세계 레코드 수집가와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니 감개가 무량합네다.
저는 지금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없는 곳에서 잘 쉬고 있습네다. 친애하는 동지 덕분에요. 책을 읽은 동무들이라면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디요.
동지를 원망하지만 증오하진 않습네다. 광명성 악단은 실존하지 않았고 저도 소설 속 인물입네다. 그래도 책 속에서 기타를 쥔 저는 자유로웠습네다. 감사합네다. 작가 동무. 그리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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