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아르날도 모밀리아노는 1956년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 중 하나’로 ‘게르마니아’를 꼽았다. 게르마니아는 현존하는 고대 게르만족에 관한 유일한 책으로, 서기 98년 로마 제정기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여행자들의 보고와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게르만족의 풍속 관습 사회상을 기록한 것이다.
모밀리아노는 이 책이 분열된 독일 민족에게 국수주의, 독일민족지상주의, 인종차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유대인 대학살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의 핵심 개념을 구상할 때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자서전에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을 붙이기 전 또 다른 제목으로 ‘게르만 혁명’을 염두에 뒀다. 그는 ‘게르마니아’라는 수도가 있는 미래의 게르만 국가를 구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버드대 고전학 교수인 이 책의 저자 크레브스는 ‘게르마니아’가 독일에서 민족주의를 부추겼지만 타키투스는 전혀 그런 의도로 게르마니아를 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게르마니아가 나치주의자들의 이념적 틀에 들어맞았던 게 아니라, 그 틀을 만드는 데 이용됐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타키투스가 그린 게르만족은 충성스럽고 신체적으로 강인하지만 문화와 교양이 없는 원시인에 가까웠다. 게르마니아는 필사(筆寫)로 전해지다가 자취를 감췄는데, 15세기에 양피지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책으로 출간되어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이후 500년간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가 이어지게 된다.
교황 비오 2세를 비롯한 이탈리아 성직자들은 독일을 수탈하고 독일 민족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게르마니아의 게르만족 개념을 끌어들였다. 독일의 지식인과 권력자들도 게르만족의 순혈성과 강인함에 대한 설명을 입맛대로 해석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게르마니아에 쓰인 게르만족의 특성에 영감을 받아 연설문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1806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독일 국민들의 조국애를 고취하려는 방편이었다.
게르만족을 현대 독일인의 조상으로 보는 관점에도 저자는 이의를 제기한다. 타키투스를 비롯한 로마인이 게르만족을 통합된 민족 집단처럼 묘사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 1871년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주변 국가들을 통일해 처음 독일제국을 수립하기 전까진 이 지역에 통일된 민족국가란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느슨한 테두리 안에 공존한 수백 개 국가에는 지리적 정치적 통일성과 결속력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단일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과거, 공유된 문화가 필요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나치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참극을 떠올리면, ‘오독’이라는 행위가 이토록 처참한 역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오독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가장 위험한 책은 타키투스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독자들이 만든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날카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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