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사랑, 고백 두 번째. 그와 나의 뜨거운 사랑의 순간은 다시 떠올려도 뭉클. 척박한 영혼을 가진 소년은 사랑의 힘으로 마음도 영혼도 쑥쑥.
‘이 영화를 보고 당신의 자녀가 느낄 성적 충동은 책임질 수 없다.’ 내 머릿속 야한 영화의 효시 격인 ‘보디 히트’(1981년)의 포스터에 실린 선정적 카피다. 초등학생 때 담벼락에서 확인한 이 문구. 영화란 ‘육욕’을 채우는 수단이라는 선입견을 갖기에 그때 나는 너무 어렸을까?
코밑이 이미 거뭇거뭇해졌을 때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소피 마르소가 나온 ‘유 콜 잇 러브’(1988년). “세상 어떤 언어로도 그의 미(美)를 표현할 수 없다”는 철딱서니 친구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소피는 나에게도 아프로디테. 영화 첫 장면에 극장 안 다른 까까머리들과 나는 모두 녹아웃. 카메라는 한껏 줌을 당겨 소피의 입술을 클로즈업. 극도로 클로즈업된 화면은 코와 눈을 돌아 귓불로 이어진다(사진 참조). 여기저기 꼴깍꼴깍 침 삼키는 소리. 내가 비로소 영화로 ‘그 욕구’를 채운 순간.(솔직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이해를 구함. 더한 것도 봤다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 추억은 아름답게 그리고 싶다.)
대학 문을 들어선 뒤 그 욕구의 자리는 지적 허영이 조금 나눠 가졌다. 인간의 지독한 욕망을 나보다 지독하게 응시했던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환상적이면서도 리얼리즘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충실했던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이 시절 내가 ‘외사랑’했던 애인들이다.
히스 레저가 죽은 동성애 애인 제이크 질렌할 집을 찾아간다. 질렌할의 방에서 그가 남긴 몇 장의 셔츠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 두 유부남의 간절했지만 허락받지 못한 사랑은 이 장면에서 목 놓아 운다. 속치마가 보이도록 퍼질러 앉아 우는 장면보다 가슴이 먹먹. “내겐 이처럼 간절한 무엇이 있었던가.” 비움과 관조라는 단어를 조금씩 알아가던 때, 내게 찾아온 ‘브로크백 마운틴’. ‘꼰대’ 같은 과거 얘기 이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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