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투사의 신변에는 묘령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며 살풍경한 사상운동 선상에 한 떨기 꽃수를 놓아줬다.”(‘삼천리’ 1931년 7월 1일,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특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는 반드시 여성이 나온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에 많은 여성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암울해도 청춘남녀가 모였으니 사랑이 피어나는 건 당연하다. 한 치 앞도 모를 정도로 불안했기에 이들의 사랑은 더욱 붉게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이 같은 로맨스는 대중의 구미를 끄는 법. 잡지 ‘삼천리’는 1931년 7월호에서 박헌영의 부인이자 당대 경성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던 주세죽(1901∼1955), 최초의 동아일보 여기자이며 여러 남성 독립운동가와 인연을 맺었던 허정숙(1902∼1991), 기생 출신의 정칠성(1897∼1958) 등 여성 사회운동가 10명의 삶을 ‘그들의 남자’, 즉 사생활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글은 삶이자 역사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까지 발간된 주요 잡지와 신문의 기사들을 재료 삼아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한반도의 굴곡진 근대사를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인물 평전을 주로 써온 엮은이는 대중지 ‘개벽’과 ‘별건곡’, 친일 어용지 ‘삼천리’,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소련 모스크바에서 발행됐던 ‘모쁘르의 길’까지 좌우 이념을 가리지 않고 당대 발간물을 샅샅이 뒤졌다.
“요즘 창경원 앞은 사쿠라 팬들로 길이 막힌다.…예전 ‘동경조일’이라는 신문에 ‘조선인은 애국심, 즉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없기에 독립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설이 실렸다. 그 글을 쓴 이가 오늘 창경원의 야간축제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좋아하며 또 한 번 글을 쓰겠는가.”(‘현대일보’ 1946년 4월 24일, ‘사쿠라’)
소설가 이태준(1904∼1970)의 ‘꽃나무는 심어놓고’는 망해가는 농촌마을에 일제가 강제로 벚나무를 심게 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그로서는 일본의 상징인 벚꽃이 광복 후에도 조선의 궁궐을 뒤덮고 있고 조선인들은 무심히 벚꽃놀이를 하는 모습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와 광복 직후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 및 모순을 꼬집는 풍자적인 글과 치열한 논평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제강점기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온 독립운동가들이 남북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자아낸다. 신식 ‘머리 말리는 기계’가 있던 서양식 미용실 모습과 담배를 물고 있는 신식 여성부터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며 양복에 백구두를 신고 다니는 젊은이까지 온갖 사상가와 멋쟁이들로 복작거렸던 서울 종로 밤거리 풍경 등을 그려낸 부분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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