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동대문 디자인플라자 공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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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조선 땐 거지들 총본산… 이젠 디자인 총본산으로 꿈틀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동대문 주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도 밤이면 패션상가들의 화려한 불빛이 빛나고, 수많은 내외국인이 쇼핑을 즐긴다. 더불어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초현대적 디자인의 새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다. 필자는 얼마 전 이 놀랍도록 획기적인 건축물의 내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여전히 내부공사가 한창이었지만, 높은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동대문 근처는 서울의 옛 모습도 꽤 많이 남아 있는 곳. 필자는 이번 스케치여행에서 과거와 현대의 교차점에 한번 서 봤다.

○ 한양 거지소굴 위에 선 디자인플라자

동대문은 서울 성곽 사대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지켜온 존재다. 그 근처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 물줄기가 성곽과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다섯 개의 홍예문(虹霓門·윗부분만 아치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문)이 있어 오간수문이라 불렸다. 옛 사람들은 수문 위에 다시 벽을 쌓아 성곽을 이어 나갔다.

각각의 수문은 평상시 창살로 막아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오간수문을 통해 성을 몰래 빠져나간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터. 대표적인 이가 바로 임꺽정이다. 조선 명종 때 전옥서(典獄署·죄수를 관장하던 관청)를 부수고 가족을 구한 임꺽정은 오간수문의 창살을 꺾은 뒤 도성을 빠져 나갔다고 한다.

오간수문과 그 주변의 성벽은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는 이유로 1907∼1908년 헐리고 말았다. 그 대신 그 자리에 다리를 놓았으나 그마저도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현재의 오간수문은 2004년 재현한 것이다. 오간수문 남쪽에는 두 개의 홍예문으로 된 이간수문(二間水門)도 있었다. 도성 밖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진 또 다른 지류가 흘러 나가던 물길이었다. 이곳은 2008년 발굴돼 그 모습이 드러났다.

두 물길이 합쳐지던 곳에는 거대한 모래산이 있었다. 영조 때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생긴 것인데, 한양 거지들의 본거지였다. 그 거지들이 모래산에 굴을 파고 살아 ‘땅거지’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지들은 대표도 선출하는 등 나름 조직을 갖추어 살았다. 추대된 두목은 ‘꼭지딴’이라고 불렀다. 세력이 크고 권세가와도 야합하였는지라 나라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래산은 일제강점기에 그곳에서 파낸 모래를 학교를 짓는 데 쓰면서 사라졌고, 1926년 경성운동장이 정식으로 준공되면서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경성운동장은 광복 후 서울운동장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80년 넘게 서울시민에게 스포츠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엄밀하게 말하면 청계천 모래산과 현재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의 위치는 전체가 아닌, 일부가 겹친다.)

새로 들어서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는 세계적 디자이너인 자하 하디드(62·여)가 설계를 맡았다. 마치 주변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급물살을 표현한 듯 건물 곳곳을 현란한 곡선이 휘감아 돌고 있다. 직선 건축에 익숙한 내게는 전혀 생소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는 건물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잘 엮은 실타래를 닮은 철골 구조물들이 벽체에 의해 가려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 은빛 고래 같은 위용

디자인플라자 투어를 끝내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을 거닐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성곽의 투박함이 세련된 디자인플라자 건물과 대비돼 더욱 고풍스러워 보였다. 여장(女墻·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이 없는 미완의 성곽을 지나 끄트머리에 있는 이간수문에 다다랐다. 수문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물이 흐르지 않는 텅 빈 수로는 을씨년스러웠다.

문득 성벽 너머로 바라본 디자인플라자가 거대한 은빛 고래처럼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마치 먼 과거의 시간 속을 헤엄치다 숨을 쉬기 위해 막 땅 위로 올라온 거대한 생명체처럼! 수문을 통해 불어오던 가을의 선선한 공기는 녀석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는 오래전 성곽을 거닐던 백성들의 이야기 소리, 근처에 터를 꾸렸던 거지들의 한숨,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며 환호성을 올리던 많은 관객의 함성이 함께 담겨 있었다. 나는 그 고요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래의 부상(浮上)을 환영했다. 그는 21세기 서울이라는 번잡한 동네의 한복판에서, 뜨거운 동대문 일대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다시는 심연으로 사라지지 않을 듯한 강한 자신감을 가득 안은 채, 도심 사이에 유유히 떠 있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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