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북 카페]62년간 매년 찍은 초상화… 中근현대사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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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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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국인의 62년 영상기록’

약 100년 전, 한 평범한 중국인이 매년 한 차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26세부터 87세로 숨지기까지 62년간 매년 한 장씩 찍은 초상화에 당시 집안과 국가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했다. 마지막 사진을 찍고 얼마 뒤 그는 숨졌지만 사진첩은 남아 사람의 생로병사를, 나아가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귀한 사료가 됐다.

그 주인공은 푸젠(福建) 성 연해도시인 푸저우(福州)에서 1881년 태어난 예징뤼(葉景呂)다. 그는 15세 때인 1896년 영국과 이탈리아, 벨기에 겸임 중국공사로 부임한 뤄펑루(羅豊祿)의 수행원으로 런던에서 5년간 살았다. 예징뤼의 어머니가 푸저우의 유명한 뤄펑루 가문에서 하녀로 일했기 때문이다.

런던 생활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최첨단 기술이던 사진을 접하면서 매년 사진을 찍는 의식(儀式)을 시작한다. 예징뤼는 고향으로 돌아와 뤄씨 집안을 도와 차(茶)가게 등을 맡으면서 생활했다.

이들 사진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우선 항상 혼자 찍었다. 1906년 결혼식 때 부인과 나란히 나온 사진, 결혼 40주년과 60주년 때 함께 찍은 사진은 따로 있다. 매년 찍은 사진은 항상 혼자다. 또 1915∼40년, 1946∼51년의 32년 동안 한 해는 서서, 다음 해는 앉아서 찍었다. 1940년 전의 사진들은 모두 전신을 찍었고 1941년 일본군이 푸저우를 점령하던 해부터는 반신상 또는 얼굴만 찍은 것도 특징이다.

모든 사진은 전문 사진가 작품으로 배경, 복장, 포즈 등에 대해 고심한 흔적들이 보인다. 흥미롭게도 오직 1952년 한 해만은 사진을 찍지 않고 종이를 오려서 모습을 표현하는 전지(剪紙·중국의 민간예술) 기법으로 옆모습 실루엣 작품을 만들었다. 여백에는 너무 참담해 검은 종이로 얼굴을 남길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중국이 갓 세워진 뒤 불기 시작한 반동분자 척결 운동에 맏아들이 조사대상이 되고, 중학생인 손자가 무심코 적어 학교에 낸 숙제 탓에 본인도 당국의 조사를 받은 해였다. 다행히도 두 사건 모두 큰 피해 없이 해결됐다.

첫 사진 속 건장한 젊은이는 한 장 한 장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지혜와 깊이를 가진 노인으로 변해간다. 살아가는 모든 이가 겪고 있고 또 겪을 수밖에 없는 변화가 한 권의 책에 농축됐다.

동시대의 다른 중국인처럼 평범하지 않은 세월을 살았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나 민국시대와 군벌시대, 항일전쟁, 국공내전, 신중국 성립,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시대를 거쳤다. 그럼에도 사진 속의 그는 몇 장을 제외하고는 늘 평온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대의 아픔이나 개인적 길흉, 생로병사로 인한 비애를 볼 수 있는 사진은 거의 없다.

또 복장과 배경 등을 통해 시대를 느낄 수 있다. 1907년 첫 사진부터 1911년까지는 청나라 말기. 사진 속의 예징뤼는 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뜨린 변발을 한 채 아령을 들고 운동하는 청년의 모습 등으로 등장한다.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예징뤼의 사진에서 변발은 사라졌다. 1944년 전쟁이 휩쓸 때는 슬픈 분위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당시 푸저우는 연일 일본군의 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푸저우에 살고 있는 그의 후손들에 따르면 예징뤼는 무슨 일이건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그의 글자 기록은 문화혁명 때 없어졌다. 이 사진첩은 2007년 우연히 알려졌고 2011년 ‘한 중국인의 62년 영상기록’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올해는 그 영문판 ‘자화상 속의 한 인생(A life in Portraits)’이 나왔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책의 향기#글로벌 북 카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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