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난, 기댈 것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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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0일 03시 00분


《 ‘오, 단순한 것… 넌 어디로 갔니?’

-킨 ‘Somewhere Only We Know’(2004년)
알렉스 레이크 제공
알렉스 레이크 제공
그이는 한때 여기 있었다. 웃었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렸다. 내리쬐는 햇살에 그이는 눈을 찡그렸지만 도시는 거대하지 않았다. 상업이나 공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이를 위해 존재하는 작은 마을 같았다. 섭씨 35도. 습도 80%. 공기는 상아색으로 부드러웠고, 흐르지 않아 더웠다. 어딜 가나 달콤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파는 가게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앞에서 도시는 오아시스로 가득한 사막처럼 차가운 빛을 잃었다. 걱정할 게 없었다. 아주 어릴 적, 작은 손으로 뻣뻣한 모래를 함께 푸며 소꿉놀이를 하던 이가 그이는 아니었지만 왠지 지난번 생에서라도 우린 그랬을 것 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까지도 우리는 불러낼 수 있었다. 시간은 잊혔고 중력은 반대로 작용했다. 우린 5cm쯤 떠서 유영하며 도시라는 거대한 세트의 엑스트라들을 구경하며 다녔다. 굳이 입을 열어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 함께 느끼는 공기처럼 그건 당연하게 우리를 감쌌다. 더위가 채 물러가지 못했지만 해는 졌다. 밤이 오면 우리는 손을 잡고 그이가 사는 곳 주변에서 입을 맞췄다. 8월은 빛났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그이는 한때 여기 있었다.

10월이 잠들러 간다. 매년 이맘때쯤 마음에도 한기가 불어닥친다. 크리스마스가 두 달 뒤로 다가왔고 내 나이의 나는 곧 사라질 것이다. 옷깃을 여며 봐도 그 차가움은 스며든다. 막을 수 없다.

섭씨 10도의 밤을 걷는다. 도시는 조는 일이 없다. 단단한 회청색 하늘 밑으로 빨간 눈을 반짝인다. 야간근무나 유흥을 위한 불빛들. 찬공기는 내 몸을 에어 그 안의 하얀 것을 남김없이 꺼내려 한다.
도시의 어떤 곳은 버려진 듯 황량하다. 사람의 냄새를 담지 못한 시멘트 덩어리.

영국의 4인조 록 밴드 킨(Keane)은 2004년 등장했다. 데뷔 앨범 ‘호프스 앤드 피어스(Hopes And Fears)’를 여는 첫 곡이 ‘섬웨어 온리 위 노(Somewhere Only We Know)’다. ‘우리만 아는 어딘가.’

‘황무지를 걸었지. 길은 손등처럼 빤히 알고 있었어. 발 아래로 땅을 느꼈고 강가에 앉았어. 완벽했지.’

분당 박자 수 87의 느린 템포. 8분 음표 하나하나를 새기며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전진한다. 피아노가 짚는 화성 위로 보컬 톰 채플린의 부서질 듯 여린 목소리가 나타나자마자 쓸쓸한 풍경을 묘사한다. 킨 멤버들이 자란 영국 남부 어느 황량한 곳일지 모른다. 곧 이어지는 후렴구.

‘오, 단순한 것, 넌 어디로 갔니? 난 늙어가고 기댈 것이 필요해. 그러니까 언제 날 들일지 말해줘. 난 지쳐가고 시작할 곳이 필요해.’

곡 중 화자는 ‘당신이 여기 있었고 모든 게 단순하고 순수했던’ 옛날을 추억하며 한숨짓는다. 나무 밑에서 당신과 키스를 나눴는데 그 늙은 나무는 지금 쓰러져 있다. 날 올려다보고 알아봐주는 것 같다.

‘시간 있다면 우리 함께 가서 얘기할까. 우리만 아는 곳으로 가서. 이건 모든 것의 끝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우리만 아는 곳으로.’

훌쩍 커버린 지금, 세상은 이제 그리 달콤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논리와 이성, 실적과 책임, 처세와 허세가 내 안의 하얀 것을 쫓아내고 들어앉는다.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은, 가시나무의 상태다. 안은 복잡하게 얽혔고 밖도 다르지 않다.

단순한 것은 남아 있다. 이건 사실이다. 시간과 중력은 우리를 자꾸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이는 한때 여기 있었다.

임오션 음악이 내가 꿈꾸는 바다. theugly76@gmail.com
#문화#이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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