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서예리(36)를 두고 음악가들은 ‘천 년을 아우르는 소프라노’라고 부른다. 11세기 중세음악부터 ‘갓 태어난’ 21세기 작품의 세계 초연까지 거뜬히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유럽 무대에서 주로 활약하는 그는 그동안 국내에서는 주로 바로크음악을 들려주었다. 드물게 접했던 그의 현대음악을 한껏 즐길 수 있는 무대가 열린다. 11월 1일 오후 7시 반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체임버홀에서 펼쳐지는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Ⅲ’다.
헝가리 태생의 작곡가 겸 지휘자 페테르 외트뵈시(68)가 이끄는 이 연주회에서 서예리는 외트뵈시의 ‘8중주 플러스’(한국 초연), 헝가리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의 ‘대학살의 불가사의’(한국 초연), 진은숙의 ‘스나그 앤 스날스’를 들려준다.
그는 ‘대학살의 불가사의’를 2009년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불렀는데 당시 이를 들은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사 IMG의 관계자로부터 ‘계약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스나그 앤 스날스’는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아리아를 발췌해 소프라노용으로 만든 작품. 진은숙은 “서예리는 이 노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부르는 성악가”라고 평했다. 8중주 플러스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위한 ‘초절(超絶)기교’로 이뤄진 작품이다. 서예리는 “세 곡 모두 소프라노가 소화하기에 기교적으로 어렵기로 유명한 대곡이다. 이 곡들을 한자리에 모았으니 볼 만한 무대가 될 거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바로크-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그에게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두 영역 모두의 전문가로 어떻게 활동할 수 있는가.” 그는 “두 분야의 레퍼토리를 각각 익히다 보니 벤다이어그램처럼 겹치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고 답했다.
“현대음악 악보를 보면 이 부분은 퍼셀의 레치타티보(말하듯 노래하는 것)처럼 부를 것, 힐데가르트 폰 빙겐의 ‘불의 기원’을 상상하면서 부를 것, 다울랜드 작품의 류트처럼 피치카토(현을 튕기는 것)할 것 등 고음악적 연주기법을 수없이 발견합니다. 현대음악의 거장 피에르 불레즈의 작품에서는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 쿠프랭의 꾸밈음이 느껴지고요. 열린 눈으로 보면 두 장르는 서로 통하는 면이 많아요.”
고음악은 아름답고 깨끗하게 부르는 일이 많고, 현대음악의 발성은 드라마틱하거나 때로 기괴하게 들릴 때도 있다.
“어느 시대나 작곡가들의 의도는 비슷해요. 성악을 하나의 악기 파트처럼 여긴다는 점이죠. 그 악기 같은 목소리로 천 가지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발성법을 원한다는 점에서요. 고음악이나 현대음악 모두 총보(모든 성부의 악기가 다 그려진 악보)를 보면서 작곡가의 생각을 추론하고 나만의 색깔을 입힙니다. 다른 사람들이 10개들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100개들이 물감을 지닌 듯 나만의 찬란한 음색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요.”
바로크음악의 대부인 지기스발트 쿠이켄(벨기에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은 서예리와 바흐 부활절 오라토리오를 함께 녹음한 뒤 지난해 솔로 칸타타 작업도 함께하자고 했다. 그가 부른 솔로 칸타타 52번 ‘거짓된 세상이여, 나는 너를 믿지 않으니’가 수록된 음반이 최근 독일에서 나왔다. 쿠이켄은 내년에 예정된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녹음에도 그를 초대했다.
“악기와 구성만 과거의 것을 따르되 해석은 너무나 현대적이고 자극적으로 채우는 연주자가 많습니다. 쿠이켄은 주관적인 해석을 자제하고 연주자 내면의 울림을 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런 점에서 생각이 일치했어요.”
이렇듯 ‘꼬리에 꼬리를 문’ 스케줄이 2015년 상반기까지 빼곡히 잡혀 있다. 그의 손에서 악보가 떠날 새가 없다. 지금도 그는 오랜만에 돌아간 베를린 집에서 한국 무대를 떠올리며 두툼한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을 것이다.
“연습하다 보면 가끔 고음악이 현대음악 같고, 현대음악을 부르면서 최신작이라는 걸 잊어요. ‘고전을 해석할 때는 현대의 작품처럼 하고, 현대작품을 평가할 때는 고전을 대하듯 하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늘 떠올립니다.” 1만∼3만 원. 158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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