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많이 받으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일상생활에서 흔히 하는 이 덕담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마도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가 될 것이다. 이 그림은 장수를 염원하는 ‘수(壽)’자 100자, 행복을 소망하는 ‘복(福)’자 100자를 그림처럼 그린 것으로 주로 병풍으로 꾸며 집안 어른이 머무는 방에 놓았다. 글자 수를 세보면 ‘수’자와 ‘복’자를 합해 모두 440자에 이르는 병풍도 있다. 백수백복도에서 ‘백’은 많다는 의미의 상징적인 숫자일 뿐, 꼭 100자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와 ‘복’자를 반복적으로 그린 까닭은 문자 뜻 그대로 많은 복을 받으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일종의 주술신앙이 표현된 것이다.
○ 그림 같은 문자
백수백복도는 전서(篆書)로 표현한 그림이다. 전서는 사물의 형상을 간략하게 기호화한 갑골문에서 시작된 서체라 회화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탓에 종류도 많고 모양도 다양하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서체를 비롯한 문화적 통일을 추진했다. 그 임무를 맡은 승상(정승과 같은 지위) 이사(李斯)는 복잡한 전서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지방마다 달리 쓰이던 여러 서체를 하나로 통합했다. 이를 ‘소전(小篆)’이라 부른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시대가 흐르면서 통일된 전서체는 다시 여러 가지 변체(變體)로 늘어났다. 이를 통칭해 ‘잡체전(雜體篆)’이라 한다. 잡체전을 살펴보면 획을 굵거나 가늘게, 또는 둥글거나 각이 지게 변화시킨 것, 사물 식물 동물 등 여러 모티프를 활용해 새로운 서체를 만든 것 등 매우 다양하다. 대나무 잎으로 꾸민 문자, 용의 형상으로 구성된 문자, 구슬로 꿰맨 문자,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문자,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으로 이루어진 문자 등 각양각색이다. 그것들은 문자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깝다.
백수백복도는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 전래됐다. 1610년 남평현(지금의 전남 나주시 남평읍 일대) 현감인 조유한(趙維韓·1588∼1613)이 전주에서 중국인에게 받은 백수도(百壽圖)를 광해군에게 바친 것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백수백복도라 전해진다. 이후 궁중을 통해 이 그림이 제작됐는데 그 흔적은 창덕궁에 있는 백수백복도를 비롯해 궁중화원인 이형록(李亨祿·1808∼?)이 그린 백수백복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궁중의 상궁이 기증한 부산 범어사성보박물관 소장 ‘자수 백수백복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자수박물관에도 자수로 만든 백수백복도가 소장돼 있다. 잡체전으로 표현된 이 병풍은 모두 288자로 꾸며져 있으며 한 폭에 36자씩 8폭으로 구성돼 있다. 직선의 획으로 구성된 서체와 자유로운 곡선으로 이뤄진 서체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고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자주색 옥색 등을 적절하게 써 다채롭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정교하게 마무리한 수결과 바늘땀, 고급스러운 색상 배합에서 궁중 자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문자와 이미지의 화려한 만남
민화 백수백복도(계명대 행소박물관 소장)는 앞의 작품과 달리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수’자와 ‘복’자가 번갈아 배치돼 있는데 잡체전의 전서 이외에 새, 개구리, 신선, 꽃, 가지, 책, 그릇, 호리병 등 자연의 이미지도 활용해 ‘수’자와 ‘복’자를 표현했다. 생물과 사물로 어떻게 문자를 나타냈는지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그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전체를 글자 모양으로 구성하기보다는 그림 중 일부인 기물에 문자를 새겨 넣는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어 개구리 위에 사발이 놓여 있는데 그 사발 위에 ‘복’자가 새겨져 있다. 개구리와 복은 특별한 연관은 없지만 사발에 새겨진 ‘복’자 덕분에 개구리가 복에 관계된 이미지인 것처럼 보인다. 호리병을 바라보고 있는 스님을 그린 인물화도 마찬가지다. 호리병에 ‘수’자를 새겨 넣어 이 이미지와 장수의 의미를 연결시켰다. 물론 호리병은 신선이 갖고 다니는 지물이라 그 자체만으로 장수를 상징하기에 충분하지만 호리병에 새겨진 ‘수’자로 인해 장수의 의미 및 상징성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자와 ‘복’자를 나타낸다면 백수백복도뿐만 아니라 천수천복도(千壽千福圖), 만수만복도(萬壽萬福圖)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민화는 잡체전으로 백수백복도를 구성해야 한다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백수백복도의 표현 영역은 한없이 넓어졌다. 새로운 형식을 찾아낸다면 굳이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풍요롭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세계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다양한 문자의 세계를 다채로운 이미지의 세계로 전환한 것은 자유로운 상상력 덕분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정한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에서 상상력은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원동력이 된다. 복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그 흔한 염원을 흔하지 않게, 더욱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화가의 아이디어가 민화 백수백복도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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