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욕 돋우는 각하를 제가 왜 미워하겠습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일 03시 00분


정치풍자 소설 ‘총통각하’ 쓴 배명훈, 작품 속 총통 앞으로 불려가다

공상과학 정치풍자소설 ‘총통각하’를 펴낸 소설가 배명훈이 지난달 29일 청와대 앞을 찾았다. 그는 “청와대 앞은 처음이지만 인왕산에 여러 번 올라 청와대를 내려다보며 소설을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공상과학 정치풍자소설 ‘총통각하’를 펴낸 소설가 배명훈이 지난달 29일 청와대 앞을 찾았다. 그는 “청와대 앞은 처음이지만 인왕산에 여러 번 올라 청와대를 내려다보며 소설을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총통 각하는 진노했다. 세간에 돌고 있는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자나 깨나 국민 안위와 국가 부강만 고민하는 자신을 권력에 집착하는 자, 시대에 뒤떨어진 구악으로 그린 비판적 소설. 억울했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당장 잡아서 족칠 수도 없는 노릇. 총통은 관저로 작가를 포함한 예술인들을 정중히 초대했다. ‘예술인과의 대화’란 명목이었다. 자리가 파한 뒤 작가를 내실로 따로 불렀다. 문제의 책 ‘총통각하’(북하우스)의 작가 배명훈(34)은 얼굴이 희멀겋다. 총통은 속으로 끌끌 찼다. ‘쯧쯧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는 백면서생이구먼.’

총통=반갑네. 총통 관저는 처음이지. 어떤가.

작가=
TV에서 본 것과 다를 바 없네요. 관저 앞 광장에 외국인 관광객만 가득하네요. 한국인은 시위 때나 오는 것 같네요.

총통=허헛, 말에 뼈가 있구먼. 공상과학소설 작가라고 들었는데, 웬 정치 얘기인가.

작가=장편 ‘타워’를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정치 얘기를 많이 다뤘습니다. 공상과학이 전혀 엉뚱한 것을 다루는 게 아니라 현실의 정치, 사회를 반영하는 겁니다.

2212년 10월 중순에 출간된 ‘총통각하’는 큰 논란을 빚었다. 200년 이상 공화국을 통치한 총통을 독재자로 지칭하거나, 심지어 총통이 고심 끝에 내린 인사권을 ‘낙하산 인사’라고 몰아세웠다. 국가도서등급판정위원회는 이를 유해간행물로 판단하고 즉시 배포금지 및 수거 결정을 내렸지만, 여론의 반발에 밀려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수위를 낮춰 판매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총통은 탐탁지 않았다.

총통=작가가 말이야, 작품에서 정치적 의사표현을 직접적으로 하면 되나.

작가=작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규율은 누가 정했나요. 작가들은 자연의 아름다움만 노래해야 하나요.

총통=어허, 이 사람이. 그래 딱 까놓고, 자네는 내가 싫은가.

작가=아닙니다. 총통께서는 제게 무한한 상상력의 자유를 줍니다. 총통님의 기사 밑에 달린 수백 개의 댓글이 신선하고 기발하거든요.

감히 총통 앞에서? 총통은 ‘당돌하다’고 생각했지만, 호기심도 들었다. ‘얘는 내가 무섭지 않은 겨?’

작가=책 내면서 주위에서 걱정도 하고, A일보 같은 곳은 인터뷰조차 안 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총통=
기백이 좋구먼. 좋아. 이번에 내 대선 캠프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가.

작가=
싫습니다.

총통=따로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작가=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 인물평만 가득한데 이보다는 후보가 당선 후 제대로 정책을 펼 수 있게 돕는 건전한 지지 세력의 존재가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서 세 후보 모두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총통=하지만 책에서 나를 비판하면서, 내 표를 갉아먹고 있지 않은가.

작가=꼭 총통을 모델로 했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정치현상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10년 뒤에 읽으면 또 딴 사람이 보이고, 아마 외국에 갖다 놓으면 그 나라의 정치인을 떠올리며 낄낄댈 겁니다.

총통=정치를 공부했다(서울대 외교학 석사)더니 정치적 언변이 뛰어나구먼. 내가 재선되면 어떻게 할 건가.

작가=
글쎄요. 아마 다시 왕성한 창작열이 솟구치지 않을까요.

총통=쿨 하구먼. 나는 총통이 되고, 자네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하하. 하하하.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배명훈#총통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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