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5일 월요일 가을/겨울비. 007과 내게 유해한 스파이. 트랙 #32 Chris Cornell ‘You Know My Name’(2006년)
007은, 정말이지, 나쁜 놈이다. 제임스 본드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연쇄살인범이요, 이 시리즈는 영화사상 최악의 청소년 유해매체물이다. 레이디가가는 딱 봐도 나빠 보이지만 본드는 아니니까 더 위험하다. 늦은 밤 호텔 방에 돌아와 톰 포드 수제 정장과 오메가 시계를 벗은 뒤 떡 벌어진 상체에 난 총알 자국에 소독약을 뿌리며 위스키 한 잔을 품격 있게 들이켜는 차가운 도시 남자.
나는 어릴 때부터 007이 내게 매우 유해하다는 걸 직감했다. 본드가 낯선 여자와 잠자리에 들 때나 악인(영국 국익의 기준에서)이 참혹한 최후를 맞을 때 내 가슴은 왠지 모르게 뛰었다. 더 이상한 건, 어른들도 딱히 이걸 보는 걸 말리지 않았다는 거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새빨간 혈액이 화면 전체를 덮어버리는 잔혹한 영화를.
007은 음악이 끝내줬다. 존 배리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제임스 본드 테마’가 첫째다. 빅 밴드 스타일의 호쾌한 관악 연주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딩디리딩딩 딩딩딩×2’ 테마는 빅 플릭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연주했는데 녹음 당시 연주비로 단 6파운드를 받았단다.
편별 주제곡도 주옥같다. 칼리 사이먼의 ‘노바디 더즈 잇 베터’, 듀란듀란의 ‘어 뷰 투 어 킬’, 맷 먼로의 ‘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 폴 매카트니 앤드 윙스의 ‘리브 앤드 렛 다이’, 티나 터너의 ‘골든 아이’…. 최근 시리즈 50주년을 맞아 주제곡만 모아놓은 앨범 ‘베스트 오브 본드’도 나왔다. 호불호가 갈리는 새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가 총을 잡은 뒤 나온 크리스 코넬의 ‘유 노 마이 네임’, 잭 화이트와 얼리샤 키스의 ‘어나더 웨이 투 다이’, 아델의 ‘스카이폴’도 꼭 들어봐야 할 곡들이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007 스카이폴’은 어둡고 암울하지만 힘 있는 007 영화였다. 악역 라울 실바는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조스와 ‘다크나이트’의 조커를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묘한 매력의 악당이었다. 실바를 은근히 응원한 나. 정말 ‘유해’한 사람으로 자라난 것 같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