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 답한다]감동에 목마른 사회, ‘이야기’에 열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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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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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사람은 왜 문학 드라마 영화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난 남의 일 같은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이야기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ID:wharez**

최혜실 경희대국어국문학과교수
최혜실 경희대국어국문학과교수
온통 이야기다. 물도 이야기 때문에 사는 판이다. 에비앙 생수가 신장 결석을 앓고 있던 어떤 후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에 반해서 다른 생수보다 훨씬 비싼데도 사 마신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이 21세기에는 훌륭한 최고경영자(CEO)로 회자되는 세상이다. 그뿐인가. 시청자들은 ‘슈퍼스타K 2’ 결승에서 누가 노래를 더 잘하는가보다는 배관공 출신의 허각이 ‘엄친아’ 존박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왜 이럴까? 그것은 이야기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개발한 마음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이야기 속에 저장한다. 우리의 기억은 이야기로 저장된다. 사전처럼 가나다순으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지 않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누가 내게로 와서 ‘김 아무개’라고 자기소개를 한다면 나중에는 그가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0년 전 무단결석으로 골치를 썩인 제자라고 소개한다면 금방 기억이 난다. ‘김 아무개’라는 고유명사가 그 일화 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외국어를 가르칠 때 문법 중심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여주고 그 속에 나오는 문장을 익히게 하거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상황극을 연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생활체험 속에서 말을 배운다. 즉, 경험의 이야기 구조 속에 단어를 집어넣어야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서론 본론 결론의 딱딱한 논문형식에다 개념어를 잔뜩 섞어 설명하는 것보다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사람들 귀에 쏙쏙 잘 들어오고 기억하기 쉽다. 광고 속의 감동적인 장면 때문에 그 상품이 불티나게 잘 팔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평범해서 볼 것도 별로 없는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이 하이네의 아름다운 시 때문에 세계적 명소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강의 시간에 어려운 말로 학생들을 한없이 지루하게 만드는 내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면 인류 역사가 수만 년인데 왜 유독 요즘 들어 이야기 산업이다, 설득 커뮤니케이션이다 해서 이야기가 각광을 받는 것일까? 첫째, 사회가 수평구조로 변하기 때문이다. 계급이 확실한 사회에서는 권력자가 아랫사람에게 명령만 내리면 된다. 아니 말도 필요 없다. 반항하는 자를 처단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조금 부조리한 일이 발생했다 하면 여론이 들끓고, 비밀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데 그중 제일이 이야기형식이다. 누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겹쳐가며 그것이 옳은지 판별한다. 이것이 공감의 소통이요, 옛말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엔터테인먼트산업에도 적용된다. 감상자들은 자기가 그동안 경험한 이야기(핵심 서사)를 바탕으로 감상을 한다. 시나리오가 자기 경험과 너무 겹치면 지루하고 너무 동떨어지면 기괴하게 생각한다. 적당히 겹쳐야 재미있고 감동을 느낀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21세기의 승리자가 되지 않겠는가.

최혜실 경희대국어국문학과교수

질문은 e메일(savoring@donga.com)이나 우편(110-715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 동아일보 문화부 ‘지성이 답한다’ 담당자 앞)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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