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야/가을의 꽃이불/바로 이거야/나를 그 위에 눕게 하고/누워서 백운대 넘어가는/구름을 보며/이거야 바로 이거/나는 하루 종일 아이가 되어/뒹굴뒹굴 놀다가/어미가 그리우면/아이처럼 울고/이거야 이거 - 이생진 ‘낙엽소리’에서
늙은 가을 11월. 도시는 초저녁 땅거미 어둑어둑할 때가 으뜸이다. 주막집마다 모괏빛 꽃등불이 화르르 불을 밝힌다. 서울 경복궁이나 덕수궁 돌담길, 정동 주변 골목주점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샛노란 은행잎비가 봄날 벚꽃처럼 흩날린다. 쏴아! 쏴아! 찬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우수수 쏟아진다. 찬비라도 내리면 물기에 젖은 낙엽이 껌처럼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미끄덩! 자칫 넘어지기 십상이다.
길바닥에 깔린 ‘낙엽 꽃이불’. 수북이 넉장거리로 누워 있는 마른 나뭇잎들. 저 멀리 먹빛 하늘 틈새로 아기별이 보일 듯 말 듯 뜨기 시작한다. 나뭇가지엔 아직도 많은 이파리가 파르르 떨며 매달려 있다. 우리는 언제 뿌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언제 가을 햇살에 피를 바싹 말려 몸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싸리비로 정갈하게 쓸어 놓은 서울 북촌 한옥마당. 그 한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대 옹기 항아리들. 그 위로 단풍잎 하나가 빙그르∼ 새처럼 내려앉는다. 눈부시게 황홀한 낙하. 은행잎이 쪼르르 그 뒤를 따라 앉는다. 뒷짐 지고 느릿느릿 북촌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맛이 그만이다.
과천 서울대공원 삼림욕장 코스(6.92km·지하철4호선 서울대공원역 2번 출구)나 동물원 외곽도로(4.2km)는 발목에 낙엽이 푹푹 빠진다. 황갈색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잎사귀들이 밟을 때마다 바스락! 부스럭! 뻥튀기과자 허리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발바닥이 달착지근하다. 평일에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길가 벤치에 앉아 도시락으로 꿀맛 점심을 먹는다.
서울대공원은 평일 1만여 명, 휴일 4만여 명이 찾는다. 삼림욕장은 천천히 걸어도 2시간30분쯤이면 충분하다. 외곽도로엔 1998년 심은하, 이성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촬영 장소가 숨어 있다. 고즈넉하다. “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 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푯말에 적힌 영화 대사 한 구절이 여운을 남긴다.
낙엽 사뿐히 ‘즈려밟는’ 맛은 어린이대공원, 삼청공원도 못지않다. 어린이대공원(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엔 낙엽길을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삼청공원(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나 5호선 광화문역에서 마을버스 이용)은 조용하고 아늑한 맛이 있다. 주변 삼청동 거리의 화랑이나 액세서리 전문점 구경도 쏠쏠하다. 삼청동수제비 등 장안에 소문난 맛집도 많다.
서울 남산은 사람과 애완견의 데이트코스다. 개 줄에 묶여 나온 개들이 낙엽더미를 킁킁거리며 자꾸만 꼬리를 친다. 늦가을 햇살과 바람이 얼마나 좋으면 그럴까. 노란 은행잎이 나무 밑동 언저리에 동그란 방석처럼 깔려 있다. 역시 은행잎은 죽어서도 굳게 끼리끼리 어깨동무를 한다. 오죽 독하면 거름으로도 쓰지 못할까. 산책 코스 곳곳에 관리원들이 만들어놓은 ‘하트 모양의 낙엽더미’가 눈길을 끈다. 붉게 물든 화살나무울타리와 애기단풍잎이 곱다. 서울거리 어딘들 낙엽이 없을까. 지방도시라고 또한 나뭇잎 쌓인 길이 없을까. 나무들은 어김없이 하나둘 옷을 벗고 있다. 추운 겨울에 살아남으려면 별수 없다. 나무는 나뭇잎과 모질게 결별해야 새봄을 맞을 수 있다. 늦가을 나무는 가지와 잎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야 한다. 떨켜는 나뭇가지에서 잎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과 영양분을 가차 없이 차단한다.
서울시내 가로수는 모두 28만여 그루. 한 해 낙엽 568만 포대(약 2만2000t)를 떨어뜨린다. 옛날 농촌에선 그런 낙엽을 썩혀 거름으로 썼다. 분뇨를 섞어 1년쯤 삭히면 기름진 두엄이 됐다. 요즘 도시의 낙엽은 대부분 석유로 태운다. 서울의 경우 한 해 소각 비용만 30억 원이 들 정도. 도회지의 낙엽은 스스로 썩어 뿌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낙엽은 ‘나무들의 사리’다. 나무의 날개다. 겨드랑이의 여린 부등깃이다. 한 가지에 피었다가, (저마다) 가는 곳을 모르는(신라 월명스님)’ 외로운 피붙이다. “사그락! 사각!” 솔잎 밟는 소리. “부스럭, 부석!” 떡갈나무 잎 으스러지는 소리. “저벅, 처벅!” 은행잎 뭉근하게 밟는 소리…. 나뭇잎 밟는 소리는 ‘뿌리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찬비가 세차게 내리더니/늦가을 낙엽은 지고/마지막 남은 잎새마저/다 떨군 나무는/1년 동안 가꾸어온/삶의 무게를 다 벗어던졌구나.//이리저리/발밑에 구르는 낙엽은/누군가 이승에 벗어놓고 간/햇살 한 줌/그리움 한 줌/슬픔 한 줌/추억 한 줌(남낙현 ‘늦가을 낙엽은 지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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