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이 다 되어 귀밑머리가 희어지도록 우리는 아들딸 두기를 바랐지만 한 아이도 보지 못하였소. 자식 두지 못한 이는 수(壽)를 누린다고 하기에 오래도록 해로할 줄로 믿었더니 어찌하여 조그만 병을 못 이기어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소.…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조선 중기 학자 권문해가 30여 년을 부부로 살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눈 아내를 잃고 남긴 제문(祭文)이다. 그가 남긴 ‘초간일기’에는 아내의 죽음 이후 날마다 울며 보내느라 일기를 쓸 겨를이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내 없는 앞날이 해 뜨기 전 아침녘만큼이나 헛헛할 것임이 느껴지는 글이다.
자식과 배우자, 부모, 벗, 스승 등 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 비어져 나오는 슬픔은 옛사람도 오늘날과 다름이 없었다. 문화사학자인 저자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대부들이 남긴 편지와 문집 속에서 이별과 죽음, 그 뒤에 밀려오는 슬픔을 적은 글을 골랐다. 이순신 윤선도 허균 정철 박지원 정약용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의 애절한 마음도 엿볼 수 있다.
자식을 앞서 보내고 쓴 글에는 슬픔에 자책감이 더해진다. 이순신은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건만,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다지도 어긋날 수 있단 말인가. 하룻밤 지내기가 1년보다 길고 길구나”(‘난중일기’)라며 통곡했다. 정약용은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네 살짜리 막내아들 농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들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소라껍데기를 생전에 보내지 못했음에 가슴을 쥐어뜯었다. “너는 강진 사람이 올 때마다 소라껍데기를 찾았고, 못 찾으면 몹시 섭섭해하였다고 했다. 이제 네가 죽고 나서야 소라껍데기가 다시 가게 되니, 슬프기 한량없구나.”(‘여유당전서’)
박지원이 형이 죽은 후 쓴 시 ‘연암골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며’는 과하게 드러내지 않기에 더욱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구를 닮았는가? 아버지 생각날 때면 형님을 보았네. 이제 형님이 생각나면 누구를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보네.”(‘연암집’)
홍대용이 친구 연익성을 잃은 후 지은 제문에는 눈물을 애써 참는 홍대용의 얼굴이 그려진다. “30년 동안 좋았던 정분이 이로써 영결이로다. 글자마다 눈물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담헌서’)
저자는 “슬픔은 시공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슬픔과 눈물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통해 어제와 오늘을 이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슬픔이 있어 더 아름다운 옛사람의 문장을 느끼고 싶다면, 아니 쓸쓸한 가을날 그저 목 놓아 울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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