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문학과의 날카로운 첫 키스였다. ‘가끔씩 이럴 때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그러면 이제야말로 안녕, 이 황량한 역이여’로 끝나는 원고지 60장, 첫 소설. 그걸 읽어내려 갈 때 동료들은 뭔가가 와닿은 듯 진지했다. ‘에이, 시시해’ 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열심히 듣고 있었다.
문학을 생산해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문학적 소통의 송신과 수신. 이 전 과정을 처음으로 경험해본 이문열(64)은 묘하게 충격적인 감흥을 받았다. 아, 이거 한번 해볼 만하다, 해도 되겠다. 1969년 어느 봄날, 세 번째로 나간 서울대 사대문학회 모임은 결국 그의 운명을 옭아맸다.》
“나는 또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그의 첫 소설 ‘이 황량한 역에서’ 중
6·25전쟁 때 월북한 인텔리 아버지, 넉넉하지 않은 살림의 홀어머니와 5남매, 뿌리 뽑힌 듯 여기저기 옮아 다니는 삶.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정규교육 과정 16년 중 이문열이 제대로 수업을 채운 기간은 8년 반에 지나지 않았다. “내 삶의 과정이 이상하게 문학화가 일어나기 쉬운 거였어요.”
외진 방에서의 긴 시간들이었다. 위로 형 둘 역시 그처럼, 혹은 그보다 더 빈번하게 학교를 쉬었다. 그렇다고 그가 생계를 책임지지도 않았기에 골방의 나날은 대부분 책 읽기에 바쳐졌다. 아무래도 재미를 좇다 보니 소설 같은 것을 읽기 쉬웠다. 좋은 문장을 보면 베껴 써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궁리도 해봤다. 글 자체에 대한 숭배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을 해야지, 소설가가 돼야지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학문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종교를 하든지 글은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혹은 내가 가진 다른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는 이기(利器)라고나 할까. 이런 식으로만 문장을 생각했고요.”
중학교는 6개월을 다녔고 고등학교는 1년만 다녔다. 중학교 때는 여건과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구러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1년을 다닌 뒤 그만뒀다. 더 다니려면 다닐 수 있었지만 다니기가 싫어졌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하나의 습성이 돼 버렸다. 한군데 몇 년 살면 너무 오래 살지 않았나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때론 불안하고 막막했다. 친구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한다고 할 때 그랬다. 거기에 ‘그래도 대학까지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겹치면서 황망함도 더해졌다. 또래보다 한 해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의 전공은 아버지가 결정해준 셈이었다. 연좌제 덕에 법대를 가 봐도 판검사가 되지는 못할 테고, 외국에 나갈 수도 없으니 이공계도 물 건너갔다. 군인이 돼도 장교는 언감생심, 육군사관학교는 먼발치였다. 이것저것 빼고 나니 남는 건 국어 아니면 국사였다. 그는 국어를 택했다.
하지만 사대 국어교육과에서의 공부가 어학 일변도라는 불만이 금방 생겼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하지 않으냐는 기분도 있었다. 이상한 답답함과 불안함이 밀려왔다. 다시 1학년 2학기를 떠돌아다녔다. 입주 가정교사로 머물던 집들도 두 달 머무는 것이 최대였다. 경찰서 사상계에서 나왔다는 형사가 때마다 들이닥쳐 그의 사정을 물었다. 집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원했고 그는 다른 곳을 알아봐야 했다.
그런 그를 사대문학회가 붙잡았다. 시도 읽고 서로 작품을 발표하고 합평회도 했다. 이렇게 자기를 형성해 가는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1969년 3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이 다였다.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 싶었다. 본격적인 문학의 시작은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체념, 절망적인 열정
사대문학회 7개월 동안 그는 중편소설 한 편, 단편소설 예닐곱 편을 썼다. 엄청난 집중의 결과였다. 비슷한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살다 보니 삶은 헝클어지고 황폐해졌다. 글쓰기로 이룬 성과는 없었고, 어떠한 전망이나 약속도 보이지 않았다. 소설 쓰기가 직업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 교원이라는 사실도 답답하고 지루했다. 그는 도망갈 궁리를 했다. 1970년 대학을 떠났고, 10년의 헤맴이 시작됐다.
“그때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이라는 게 있었어요. 당시 고등고시를 보려면 일반대학을 졸업하거나 법대 3년을 수료해야 했는데 이 시험을 치면 고시를 볼 자격을 줬지요.”
학교를 때려치우고 다른 데로 뛰쳐나갈 마땅한 핑계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그해 11월 예비시험을 합격하고 본격적으로 고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1969년 봄날의 날카로운 첫 키스가 그에게 새긴 문학병(病)은 깊었다. 이듬해 처음 도전한 1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난 뒤 6개월여, 그는 다시 원고지를 끼고 살았다. 가을바람이 불 때쯤에야 돌입한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고시도 안 되고, 군대도 안 가고, 학교는 중퇴고, 직업은 없고, 되는 건 하나도 없었죠.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는 결혼을 했고 군대를 갔다.
제대한 뒤의 그에겐 책임질 삶이 있었다. 대구고시학원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그의 별명은 ‘전천후 강사’였다. 다른 강사가 이유 없이 펑크를 내고 떠나버린 수업을 그가 떠맡았다. 과목이 국어든, 행정법이든, 국사든, 사회든, 심지어 영어든 상관없었다. 하루 10시간 강의를 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짜증이 나서 문학이라는 걸 한참씩 잊어버리고 지내기도 했다.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은 있었어요. 이러다 여유가 생기면 글을 쓰겠고, 기어이 등단을 안 시켜준다면 훗날 내 글을 모아서 옛 어른들 문집 내듯이 자선집(自選集)이라도 내 돈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1979년 불규칙한 강사생활을 접고 대구매일신문에 들어가 편집부 기자로 있으면서 문학의 숨통이 다시 트였다. 손이 비는 시간에 신문사 자료실에서 실컷 책을 읽었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해 동아일보가 신춘문예에서 최초로 중편부문을 신설했다는 신문 공고를 보고 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20여 일 만에 완성한 ‘새하곡(塞下曲)’으로 그는 당선이 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10년이나 떠돌다 겨우 문학을 하게 됐는데 이제 꼼짝 못하고 여기 잡혀왔구나.’ 더이상 도망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 같은 거였어요. 새로 무엇을 추구한다거나, 문학 이상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겠다는 것. 이것밖에는 길이 없겠다, 평생 이걸 하면서 늙겠구나, 하는 것.”
그에게 체념은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적인 열정이었다. 이판사판, 여기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 이 이상 더 갈 데가 없게 돼 버린 그의 선택은 체념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강렬한 집착으로 변했다.
“이번 생애는 작가로 끝낸다”
이문열은 이후 문학에서 도망갈 생각을 별로 못했다. 물론 작가로서 그의 삶이 몇 번 우그러뜨려지기는 했다. 대표적인 게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이 됐을 때였다. 하지만 이것은 도망이 아니고 작가 노릇 하던 30여 년 생활에 있던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 그에게 정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 되는 어떤 것이었다. 아버지의 그림자 때문이라고나 할까. 일종의 본능처럼 돼 버렸다.
나중에 그가 40, 50대 때 주위에서 국회의원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는 효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내가 사십 몇 년 동안 나 자신을 글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었는데 지금 와서 정치를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정치를 지망해서 자신을 연마한 사람에 비해 얼마나 효율성이 떨어지겠는가 말이죠.”
그는 “이번 생애는 작가로 끝낸다”고 농담 삼아 말하곤 한다. “다음 생이 오면, 그리고 그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몰라…. 정치를 선택해 볼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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