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없는 음악에 오염된 이 도시에 잊지 못할 콘서트를 선사해주마.” 은행에 복면강도 일당이 들이닥친다. 그들이 “꼼짝 마!”라고 외치자 벌벌 떨며 숨죽이는 은행직원과 손님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이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다. “꼼짝 마! 우리는 음악을 들려주러 왔다.”
정작 은행을 터는 데는 관심이 없는 강도들은 인질이 된 사람을 관객 삼아 진짜로 공연을 한다. 그런데 공연도구가 특이하다. 일당 중 누군가는 종이에 ‘쿵쿵’ 도장 찍는 소리를 내고 손톱으로 키보드를 ‘드르륵 드르륵’ 긁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창구 유리를 규칙적으로 때리면서 때때로 동전을 던져 ‘잘그랑 잘그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파쇄기에 지폐를 넣어 종이가 바스러지는 소리도 이용한다. 은행 내부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소음에 어느새 전문가의 손과 감각으로 다듬어진, 정교한 리듬과 박자가 얹어진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멋들어진 합주. 지난해 개봉한 스웨덴 영화 ‘사운드 오브 노이즈’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 강도들은 사실 도시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지루하고 따분한’ 음악에 못 견뎌 하던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뻔한 음악에 ‘반격’하겠다며 세상에 널린 일상적인 소음을 원료로 삼아 세상에 없던 ‘소음 음악’을 만들어낸다.
사람의 손으로, 혹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소음을 매만져 그것을 음악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시도는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자동차 소음도 음악이다
컴퓨터 옆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린다. 너무나 익숙한 일상 속의 소음이다. 이번에는 차 문을 세게 닫는 소리가 난다. 음악 편집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옮겨진 각각의 파일에는 차가 내는 각종 소음이 종류별로 담겨 있다. 차 문을 여닫는 소리는 물론이고 경고음이 ‘삑삑’ 하고 울리는 소리, 보닛을 세울 때 쓰는 철제 지지대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 나는 얇고 긴 금속 특유의 마찰음 등 자동차에서 집음(集音)한 온갖 소음이 스피커에서 튕겨 나오며 귀를 괴롭힌다. 이곳은 13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DJ소울스케이프(본명 박민준·33)의 작업실. 제멋대로 뛰어다니던 규칙 없는 소음들을 DJ의 감각과 손길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DJ소울스케이프는 한 미국계 자동차회사의 신차 출시 행사에 쓰일 음악을 준비하고 있다. 자동차회사는 보닛과 트렁크 여닫는 소리는 물론이고 사람이 주먹으로 타이어를 때리는 소리, 차체를 두드리는 소리 등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소음까지 총 49종의 음원을 채집했다. 이런 소리들은 3분짜리 음악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DJ소울스케이프는 우선 엔진소리를 음악 편집 프로그램에 얹었다. 그러고는 엔진소리의 음높이를 올리고 소리를 거꾸로 뒤집었다. 여기에 소리가 울리며 반복되게 하는 효과를 입혔다. 그러나 원판은 변하지 않는 법. 몇 번의 ‘화장’을 해도 엔진소리는 여전히 ‘부르르릉’거렸다.
“음악도 아니고 소음도 아닌 이 애매한 소리는 뭔가” 하는 느낌이 드는 찰나 소리가 제 가능성을 한껏 펼치기 시작했다. DJ소울스케이프는 엔진소리에 더할 두 가지 소음을 더 매만졌다. 차 보닛 철제 지지대의 금속 마찰음은 음높이를 약간 끌어올리는 식으로 살짝 손을 봤다. 문 닫는 소리는 저음부를 확대하고 소리를 짧게 끊어줬다.
이제 세 가지 소리의 길이를 각각 조정하고 적절한 위치에 늘어놓더니 동시에 재생했다.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어우러지던 세 가지 소리는 어느새 신나는 클럽 음악으로 변신했다. “어떤 소음이든 약간의 변형을 줘 질서를 부여하고, 그 소리를 적소에 배치해 리드미컬하게 합쳐주기만 하면 가장 원초적인 음악인 비트가 만들어져요.” 그는 “누군가가 소음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관심을 조금만 가지면 공해의 주범인 소음도 예술의 원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소음 재활용은 인간의 본능
소음을 활용해 음악을 만들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어왔다. 1948년, 프랑스 방송국 엔지니어였던 피에르 셰이퍼는 일상생활 속의 소음을 이용해 음악에 대한 개념을 바꾸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구체(具體)음악이라 불리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구체음악이란 기차 소리, 사람들의 소리, 자동차 소리 등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녹음된 소음의 속도, 진행 방향, 길이, 주파수 등을 변형한 뒤 편집해 음악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을 말한다. DJ소울스케이프의 작업도 구체음악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전자장치와 소프트웨어 관련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소음을 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은 한층 쉬워졌다. 그 덕분에 소음의 가능성과 활용도에 주목하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특히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 자동차 소리는 이미 여러 음악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올봄에는 국내 자동차 제조사 한 곳이 자동차 소음을 재료로 멜로디와 가사를 붙인 노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국의 한 헤드폰 제조사는 지난달 소음공해를 실시간으로 음악으로 바꿔주는 ‘사운드 택시’를 만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택시 외부에 마이크를 달아 소리를 수집했고 택시 안에서는 사운드 아티스트들이 음향 전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외부의 소음을 실시간 음악으로 변환했다. 1997년 독일의 음향디자이너 악셀 루돌프는 자동차 소리를 새소리, 분수 소리 등이 어우러진 음악으로 바꾸는 음향전환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컴퓨터 마우스 소리, 스마트폰의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 휴대전화의 메시지 도착 알림음 등 21세기를 상징하는 최첨단 장비의 소리를 모아 연주곡으로 만드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왜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는 소음에 주목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추구가 소음을 재해석 재발견하게 하고 있다고 본다. 배명진 숭실대 교수(소리공학연구소장)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원료인 소리는 지금까지 악기 소리, 사람의 목소리, 전자음 등으로 상당히 제한돼 있었다”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흔하고 뻔한 소리에 익숙해진 귀를 깨워줄 새로운 소리를 찾는다”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소음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잘 가공하고 활용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고 음악을 풍성하게 해주는 최상의 원료가 되지요. 새로운 소리를 찾는 인간의 시도는 본능입니다. 새로운 기계가 만들어지고 또 새로운 소음과 소리가 생기는 한 앞으로도 그런 시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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