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때로는 태산보다 무겁고 때로는 새털보다 가볍다.’ 48세에 감옥에 갇혀 궁형(宮刑·거세)이라는 형벌을 받고 죽음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던 사마천이 남긴 말이다. 이 말처럼 죽음을 새털처럼 가볍게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숙명적인 극한의 공포다. 그런데 ‘행복한’이란 형용사를 죽음 앞에 두는 무모함이 가능할까. 29일 개봉하는 일본 다큐멘터리 ‘엔딩노트’(전체 관람가)는 그래서 무모하지만 용기 있는 영화다.
40년간 화학회사 샐러리맨으로 일한 69세 스나다 도모아키 씨. 임원까지 지내며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끝내고 67세에 은퇴했다. 이제 노후의 안락함을 즐겨보려고 했는데 불청객이 찾아온다. 위암 4기 진단. 다른 장기에도 암세포가 퍼져 수술은 불가능하다. 꼼꼼한 성격인 스나다 씨는 죽을 준비에 들어간다.
먼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는 버킷 리스트 만들기. 무신론자로 살아왔지만 처음 신을 믿어보기, 손녀들 머슴 노릇 실컷 해주기, 자민당만 찍어왔지만 다른 당에 투표하기 등의 목록이 수첩에 적혔다. 장례식에 초대할 지인들 명단 작성,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는 것들 정리는 기본이다.
암에 걸렸다는 말에 가족의 반응이 흥미롭다. 아내는 화를 냈다. “일이네 접대네 하며 만날 집을 비우다가 이제 좀 같이 지내려고 했더니 암에 걸려 죽는다고?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다. 자식들은 암이 없어진다며 당근즙을 마시게 했다. 스나다 씨는 “반드시 무농약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데, 평생 농약 투성이인 채소만 먹고 산 내가 이제 와서 유기농이라니…”라고 투덜투덜. 막내딸의 목소리를 빌려 독백을 하는 스나다 씨의 ‘모태 밝음’ 우스갯소리에 보는 내내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가족이 스나다 씨를 임종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기 어렵다. 평생 아내에게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 손녀들에게 들려주는 “너희들이 있어 행복했다”는 말에는 볼이 촉촉해진다.
촬영, 편집, 내레이션 등 일인 다역을 맡은 이는 실제 스나다 씨의 막내딸 스나다 마미 감독. 그는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원더풀 라이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밑에서 조연출로 일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록한 이 영상이 데뷔작이 됐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가족을 촬영한 영상들이 이 영화에 더해져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한다. 30대가 가질 법한 발랄함과 애늙은이 같은 관조적 시선이 어우러진 연출이 돋보인다.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2개관으로 개봉해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스나다 씨의 ‘해피엔드’를 지켜봤다. 올해도 흥행이 계속되고 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생의 마지막에 있는 분들, 그래서 친구처럼 속삭이며 위로해주는 영화가 간절한 관객이라면 표 값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따뜻하고 유쾌한 친구의 목소리가 새털처럼 가벼운 죽음을 안내할 테니까….
이 밖에도 죽음을 다룬 영화들이 최근 잇달아 관객을 찾는다. 22일 개봉하는 ‘심플라이프’는 영화프로듀서가 평생 자신을 키워준 가사도우미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담담히 그렸다. 내달 19일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가 찾아온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노인을 통해 안락사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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