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명랑만화 같은 삶, 4.96m² ‘천국’서 시작됐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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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복 교수의 인생을 바꾼 귀국

“자랑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꿀릴 것도 없는 인생이다.” 이원복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데 다행히 그럴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담백하고 시원시원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자랑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꿀릴 것도 없는 인생이다.” 이원복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데 다행히 그럴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담백하고 시원시원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너 그러다 국제 거지 된다.” 독일(당시 서독)로 떠난 지 9년 반, 잠깐 들른 서울에서 형님이 말했다. 잔말 말고 이력서나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만화를 더 배워보겠다고 유학 가서 택한 디자인 공부가 10년 가까이. 얼른 끝내고 너희 나라로 가라는 뜻이었는지 성적은 좋았고 총장상도 받았다. 한국의 어린이신문 만화 연재로 받는 원고료와 현지 아르바이트로도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아예 영주할까 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국내에서 취직하는 건 꿈도 꿔본 적이 없었는데…. 내일모레면 마흔이었던 이원복(66·덕성여대 석좌교수)은 곰곰이 생각했다. ‘에라 모르겠다. 놀 만큼 놀았으니 돌아가자.’ 1984년 8월,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그의 인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랐다.》

나만의 공간
4.96m²(1평 반). 1975년 3월 2일 독일 뮌스터대에 첫발을 디뎠을 때부터 영구 귀국하기 6개월 전까지 학교 기숙사의 그 공간은 이원복만의 것이었다. 침대와 작은 테이블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한쪽 벽에 붙은 침대에 누워 손을 옆으로 뻗으면 맞은편 벽이 닿았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1단짜리 냉장고에는 맥주가 차있었고, 발치에 놓인 중고 TV는 발가락으로 껐다, 켰다 할 수 있었다. 창턱에 받쳐 놓은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낙원이었다.

“답답한 게 어디 있어. 그보다 더 비좁고 가난한 데서도 살았는데. 6·25전쟁 직후를 생각해 봐.”

소년한국일보에 싣던 여행만화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나 ‘먼 나라 이웃나라’ 취재를 위해 중고차를 타고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어떨 때는 3000km나 떨어진 지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 먼 곳에서 이 작은 방으로 기어들어가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일종의 귀소(歸巢)본능이었다.

독일에는 먼저 유학 가 있던 손위 형님 둘이 사준 편도 비행기표로 왔다. 곧 그는 혼자가 됐다. 두 형님은 1년 안에 모두 학위를 마치고 돌아갔다. 자존심은 있어서 형님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원고료와 아르바이트비로도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1981년 학·석사 통합학위에 해당하는 디플롬(Diplom)을 딴 뒤로는 박사과정에 적만 걸어놓고 놀러 다녔다.

“한량이었지. 고등실업자인데 먹고살 건 있는 처지. 풍족한 비정규직이었지. 미래가 막막한 게 아니라 아예 중요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무슨 욕심이 있었거나 한 건 아니었어. 차 끌고 놀러 다니고 만화 그리고. 진짜 미래의 비전이 전혀 없는 삶이었지.”

완벽한 자유의 몸이었다. 7남매의 막내에, 부모님은 스무 살 이전에 모두 돌아가셨다. 장가도 가지 않아 부양할 처자도 없었고, 어느 누구한테 신세진 것도 없었다. 책임질 일도, 의무감이 드는 경우도 생기지 않았다. ‘나 혼자만 잘하면 된다.’ 자신의 한 몸,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곳이면 고향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형님에게 대충 적은 이력서 한 장을 던져주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래가 보이지 않기는 했다. 눈에 띄는 차별은 없었지만 아시아인 등 이주민을 확실하게 구별하던 독일 사회였다. 독일어를 능숙하게 하고 실력도 좋았지만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명확했다. 뭐, 올라갈 생각도 하지는 않았지만. 디자인으로만 잔뼈가 굵은 별 볼일 없는 아시아인으로 인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건 ‘2등 국민’도 아니고 ‘2등 인생’이 될 게 뻔했다.

옷가방 하나 훌쩍 메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독일에 올 때도 가방 두 개가 그의 짐 전부였다. 공수거공수래(空手去空手來)였다.

혼자 걸어오다
경기중고교를 다닐 때 그는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급우들은 모두 그를 ‘만화만 그리던 애’로 기억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앞자리에 앉아 쉬는 시간마다 낙서처럼 그림만 그리던 그였다. 영화에서 본 카우보이, 불을 뿜는 쌍권총, 연기가 뽀얗게 올라오는 여송연과 마도로스파이프 같은 것들이 뚝딱 그려졌다. 당연히 성적은 중하(中下)에 조용하기까지 하니 ‘흔적 없는 학생’쯤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얻어 걸린 소년한국일보 만화 아르바이트 이후 그의 운명은 그림 안에서 다 이뤄져 버렸다. 외국의 만화에 트레이싱페이퍼를 대고 베껴 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2년 정도 베껴 그리고 나니 이번에는 외국 작품을 보고 그리는 작업이 맡겨졌다. 그렇게 1, 2년이 흐르고 나니 이제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창작품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됐다. 대학에 올라가서는 어린이 신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연재를 동시에 3건이나 할 정도가 됐다.

“아버지나 형들도 막내가 혼자 벌어서 자기 학비를 다 대니 대견스러워했지. 만약 우리 집이 지금 개념으로 정상적인 가정이었으면 그렇게는 못했겠지만.”

그의 부모는 6·25전쟁 전에 대전에서 공장과 여관업을 했다. 유명 영화배우들이 촬영차 대전에 내려오면 으레 그의 부모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묵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모든 것은 풍비박산이 났다. 1955년 가족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고 사글세방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을 머릿속에 그리며 재수 끝에 입학한 서울대 건축과는 첫 수업에서 환상이 깨진 뒤 거의 나가지 않았다. 대신 만화를 그렸다. 당시 서울 공릉동에 있던 ‘청암사’라는 공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남들이 잘 때 작업을 했고, 남들이 수업을 들어갈 때 잠을 청했다. 커피를 진하게 타마시고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숱한 밤을 새웠다. 수업에서 과 친구들이 돌아올 무렵에 잠이 깼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들을 몰고 시내에 가서는 원고료를 받아 맥주를 마셨다. 그의 술을 얻어먹지 않은 건축과 동기생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참 속 편하게 살았어. 틈만 나면 미팅 나가고, 돈 생기면 술 마시고. 닥치는 대로 살았어.”

그가 파이로트 제도용 잉크에 펜촉을 적시지 않았던 때는 1965년 재수할 때 6개월이 전부였다. 열여섯 살 터울의 큰누님 댁에서 기숙할 때였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차마 만화를 그릴 수는 없어서 당분간 연재는 중단했던 터였다. 그 기간 말고는 그에게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재능이 있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야. 과대평가하면 안 돼. 어린 나이서부터 베끼고, 보고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 소재나 인물을) 따오기도 하면서 별짓 다하는 동안 실전 트레이닝을 세게 받은 결과일 뿐이라고. 자꾸 반복하다 보면 숙련공이 되는 거야.”

그냥 놔두면 저 혼자 잘 굴러가는 아이 같았던 그는 결국 6년이나 대학을 다녔지만 수업일수 미달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스페인편. 동아일보DB
‘먼나라 이웃나라’ 스페인편. 동아일보DB
▼이원복이 예술가냐고? 문화로 이끄는 커넥터지!▼

이원복에게 만화는 빵과 놀이였다. 젊었을 때 숱하게 새웠던 밤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만화 그리기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치 덤처럼 만화는 그의 생계도 책임져 줬다. “내 만화는 예술이 아니야. 나는 한번도 예술가라고 말한 적이 없어.” 그럼 무엇일까. “나는 통역가라고 이야기했어. 되새김위의 작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문화에)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하나의 커넥터(연결자)지.”

돌아보면 지나온 삶에 위기나 어려움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큰 걱정을 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야.” 늘 낙관적이었다. 이현세나 박봉성같이 극화(劇畵)를 그려볼 생각은 없냐고 했더니 “미쳤어? 힘들어서 안 해”라고 한다. 여기저기 쑤시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한 우물만 확실하게 파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만화 인생도 길어야 5년이라고 잘라 말한다. “칠순까지 하면 다행인 거지.” 꼭 하고 싶은 작품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여기저기 손댔다가 수습도 못하고 그러느니 자신의 작품 ‘가로세로 세계사’나 확실하게 끝내고 갈까 한다고 했다.

“나야 현실주의자지. 낙관적이고.” 낙관적이라는 말과 현실주의자라는 말이 양립 가능한 걸까. 희한하게도 이원복은 늘 낙관적인 현실을 만들어온 것 같았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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