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늑대를 인간으로 만든 한마디 “기다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4일 03시 00분


◎ 영화와 심리학
‘늑대소년’의 철수와 순이

영화 ‘늑대인간’은 기다림과 사랑, 신뢰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동아일보DB
영화 ‘늑대인간’은 기다림과 사랑, 신뢰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동아일보DB
“기다려!” 감자를 올려놓은 손바닥을 내밀며 순이(박보영)가 철수(송중기)에게 말한다. 눈앞에 음식이 보이기만 하면 통제 불가능한 식욕을 드러내는 늑대소년 철수를 길들이기 위한 순이의 노력은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늑대로서의 본능적 욕구를 참아낼 수 없는 철수는 감자를 쥔 순이의 손에 자신의 이빨자국을 선명하게 남기고 만다.

영화 ‘늑대소년’에는 짐승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존재, 늑대소년이 등장한다. 늑대소년을 인간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욕구조절 능력이다. 늑대소년에게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먹고 싶은 음식이 눈앞에 보이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상처가 나더라도, 바로 물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현재의 욕구를 억누르고 기다릴 줄 아는 능력, 즉 만족지연 능력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능력이 강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마시멜로 실험’이 유명하다-편집자) 따라서 감자를 먹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순이의 손을 물어버린 늑대소년은 소년이기보다는 늑대에 더 가까운 존재다.

기다림을 참아내는 능력
시간이 지나면서 늑대소년은 순이의 길들이기에 점점 반응하기 시작한다. ‘기다려’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자신의 본능적 욕구 분출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늑대로 변해서 사람을 죽이려던 순간에도 순이의 ‘기다려’는 늑대를 소년으로 돌려놓는다. 늑대소년은 본능적 욕구에 지배당하는 ‘늑대’에서 자신의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해간다.

소녀와 늑대소년 사이의 사랑은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커져간다. 순이는 철수에게 양치질에서 말과 글까지,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준다. 철수에게는 순이의 따뜻한 손이 가장 큰 보상이 된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순이의 손길을 받기 위해 철수는 기다림을 참아낸다. 자신의 본능을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는 순이는 늑대소년에겐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동화인 ‘늑대소년’의 사랑은 묘하게도 어머니와 아이의 사랑과 닮아 있다.

사람도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는 늑대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능적 욕구로 가득 차 있지만,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도 조절하고자 하는 동기도 없는 상태다. 늑대소년과 다름없었던 아이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존재,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다.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고통스럽게 배워야 하는 것도 생긴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생후 약 6개월이 지나면 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시작된다. 어머니의 품에서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울고 발버둥친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이 주는 고통의 크기도 커진다. 사람이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최초이자 가장 큰 심리적 통증은 바로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에 발생한다. 어머니와 떨어질 때 아이들이 보이는 극심한 불안이나 공포반응을 격리불안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이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지 마’라는 메시지다.

기다리면 돌아온다는 믿음
아이들이 격리불안을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시기의 아이들은 기다리면 어머니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동 인지발달 연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장 피아제에 따르면, 태어나서 약 두 살 전까지의 아이들은 어떤 대상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마치 이 세상에서도 사라진 것처럼 생각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아이들이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떤 대상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대상영속성’ 개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두 살이 되었을 무렵이다. 이때가 되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없어도 세상 어딘가에는 살아있을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다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영속성 개념을 획득했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어머니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메리 에인스워스에 따르면, 자신이 필요로 할 때 어머니가 반드시 돌아와 자신을 지켜줄 거란 믿음이 형성된 아이들만 불안해하지 않고 어머니를 기다릴 수 있다고 한다. 기다리기 위해서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아이들은 불안수준이 낮으며 어머니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성인이 되면 집착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는, 건강한 사랑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람들은 아기 때 배운 방식대로 사랑을 하게 된다.

인간이 된다는 건 기다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사랑은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다. 순이가 늑대소년 철수에게 수없이 했던 말, ‘기다려’는 사람과 사랑을 만드는 주문인 것이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wooyoung@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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