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지 씨(가명·여)는 지금의 회사를 8년째 다니고 있다. 사내 입지가 비교적 탄탄하고, 사장의 신임도 두터운 편이다. 본인도 애사심이 크다고 자부한다. 그랬던 그가 요즘 속병을 앓고 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단골 고객 B와 후배 여직원 C가 전화 통화를 하다 언쟁이 붙었다. B가 예약시간과 가격을 잘못 알고 있었던 탓이었지만, 조 씨가 중재에 나서 사과까지 했다. B는 회사까지 찾아와 그와 C에게 정식 사과를 요구했다. 이건 좀 지나치다 싶어 이번엔 B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 줬다. 흥분한 B는 사장에게까지 찾아갔다. 사장은 정확한 내막도 파악하지 않은 채 직원들에게 사과할 것을 지시했다. 다른 사항도 모두 B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고 했다. 》 조 씨는 심한 굴욕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B에 대한 분노가 차츰차츰 사장에 대한 섭섭함으로 변질됐다.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열심히 하는 것 잘 안다. 이번 기회에 까다로운 고객을 응대하는 방법을 좀 더 연구해 보라”라는 말만 돌아왔다. 사장이 직원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조 씨는 더 우울해졌다. 화장실에서 1시간이나 울고 나왔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안 힘든 직장이 어디 있겠어?”란 남편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기가 막힌 건 또 있었다. 문제의 단초를 제공한 C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쾌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대가가 이런 것인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상처 조 씨를 괴롭히는 감정의 핵심은 ‘배신감’이다. 그는 사장이 자신의 힘든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했다. 사장이 어쩔 수 없이 ‘진상’ 고객의 편을 들어줬지만, 최소한 눈짓으로라도 자신이 옳았음을 인정해 주길 바란 것이다. 그런데 면담을 요청했을 때 위로는커녕 “더 잘하라”라는 지시만 받았다. 그는 자신에게 ‘이 회사에서, 아니 사장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했다. ‘넌 그저 회사의 한 부속품이야. 사장님과 네가 가족 같다는 생각은 온전히 너 혼자의 착각이야.’
그는 비참해졌다. 자존심도 상했다. 그는 필자와 울면서 상담하다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도 저는 그저 수많은 환자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죠?”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1908∼1970)는 인간에게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말했다. 1단계부터 차례대로 나열하면 생리적 욕구, 안정과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인정·자존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다. 조 씨는 4단계인 인정·자존의 욕구에서 좌절을 맛본 것이다.
그는 사장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었다. 회사 후배 C에게도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선배로 인정받고자 했다. 자신의 설득에 B가 수긍하고 일이 잘 마무리되면, 스스로에게도 자신의 문제 해결 능력을 확인받는 셈이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컸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라 조 씨는 우선 자신이 지금 많은 위로와 공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남의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읽어 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지금 그 고객 때문에 힘들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사장님 제가 지금 그 고객 때문에 크게 상처받았는데 제 사기 좀 북돋워 주세요. 위로의 말씀 한마디면 됩니다”라고 말이다. 이 상황에서 사장에게 왜 고객 편을 들었느냐고 따져 봤자 전혀 이로울 게 없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 회사에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는데 내 얘기 좀 들어줘”라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남이 내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수준을 낮춰라. 이를테면 ‘사장이 잘해 주는 건 그저 일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다’, ‘내가 느끼는 친밀감은 일종의 익숙함과 집단소속감이다’, ‘직장에서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기대하지는 말자’ 등으로 말이다.
되짚어 보자. 사장은 면담을 요청한 그에게 위로 대신 분발을 요구했다. 이제까지 잘해 왔던 건 알고 있지만, 자신의 기대에 100% 부응하진 못했다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다. ‘친구 같은 사장’, ‘아빠 같은 사장’은 사회적 계약관계를 기본으로 하되 가족관계에 근접한 ‘하이브리드 관계’다. 사장은 업무적인 것에만 충실하고, 하이브리드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사장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기보다 그가 당신에게 원하는 추가적인 역량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가 혹여 직장을 그만둘까 봐 염려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 걱정은 분명 덜어 줘야 하지만, 남편이 자신에게 지나친 의존을 하지 않게끔 수시로 남편의 역할을 요구하라. 후배 C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거나 배려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내가 먼저 나서서 일을 가르쳐 주거나 도와줄 필요가 전혀 없다. 먼저 도움을 청한다면 그때 응하라. 그래야 상대방도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고마움을 표시할 것이다.
심리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주변인보다는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고쳐 나가는 게 훨씬 현명하다. 이것 하나만 기억하자. 슈퍼우먼이 돼 크게 인정받으려는 것은 자기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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