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경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시인에게 이렇게 물으면 곤란해하기 일쑤다. 대개의 시인은 시가 발표되는 순간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말하며, 평가는 독자와 평론가의 몫으로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래도 재차, 삼차 끈질기게 묻는다면 대개는 이런 그럴싸한 답변으로 피해 간다. “저는 아직 대표작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시선집에 눈길이 가는 것은 시인들에게 ‘대표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 뒤, 그 이유까지 산문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1942년생 천양희부터 1976년생 김경주까지 시인 63명이 대표시를 골랐다.
질문이 어려웠기 때문일까. 끙끙대며 답을 써 내려간 시인들의 고뇌에 때론 웃음이, 때론 감동이 전해진다. 대표시를 정하는 과정에서 시인이 시를 대하는 자세, 시인의 문학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인의 내밀한 생각을 읽는 데 유용하다.
천양희는 시 ‘직소포에 들다’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1979년 여름 찾아간 전북 부안군 직소폭포에서 쩌렁쩌렁한 폭포 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 폭포와의 첫 만남 후 13년 만에 시를 완성했다는 시인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된 시다. 내 정신의 긴 투쟁 끝에 살아남은 시”라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시인 63명의 대표시를 읽다 보면 ‘부모에게 바친’ 시들이 여럿 눈에 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쓴 이시영의 ‘고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아버지와 나의 회상을 그린 이홍섭의 ‘터미널’, 유머가 가득한 어머니 얘기를 쓴 이정록의 ‘의자가 되어라’, 새 시집이 나온 날 아버지가 사망한 박형준의 ‘시집’….
논리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게 시라는 장르임을 감안하면, 먼저 떠나보내 만날 수 없는 가족만큼 애틋한 소재가 있을까 싶다. 박형준의 글에 오래 눈길이 갔다. “젊은 세대들에게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라고 설교할 생각은 없다. (중략) 다만 아버지를 느껴보는 순간이 나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 아니라 살아계실 때, 같이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같은 국에 숟가락을 담그고 떠먹을 수 있을 때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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