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상상해 보자. 고우 김옥균부터 고하 송진우, 설산 장덕수,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를 암살한 암살범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창작뮤지컬을. 준엄해도 너무 준엄한 뮤지컬이 되지 않았을까.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진정한 ‘작가’로 꼽히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어쌔신’의 기발함은 이런 통념을 뒤집은 데 있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1981년 로널드 레이건까지 미국의 현직 대통령을 암살했거나 암살하려 했던 암살범 8+1명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신성모독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현기증 나는 웃음을 안겨준다.
암살되거나 암살 대상이 됐던 대통령들은 철저히 암살범의 시각에서 희화화된다. 링컨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6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독재자가 되고, 닉슨은 신성한 민주주의에 오줌을 갈겨 놓은 배은망덕한 놈이 된다.
암살범들의 암살 동기는 한술 더 뜬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로(가필드를 암살한 찰리 귀토), 배가 아프다는 이유로(프랭클린 루스벨트 암살을 시도한 장가라), 사이비종교 교주를 널리 알리려(포드 암살을 기도한 프롬), 흠모하던 여배우의 주목을 받고 싶어서(레이건 암살을 기도한 힝클리)….
하지만 2005년과 2009년 두 차례나 무대화됐던 작품들은 객석에서 큰 웃음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멋지고 잘생긴 배우들이 암살범들에게 너무 감정이입됐기 때문이다. 관객들에게 우습게 보이기보다는 나름의 진실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3번째 제작된 어쌔신은 이와 반대로 우습게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 9명의 배우들은 멋지게 보이기보다는 어떻게든 엉뚱한 열패자(루저)로 보이려 최선을 다한다.
그 선두에 선 배우가 이번 작품의 연출까지 맡은 황정민이다. 작가이자 목사였고 프랑스대사를 꿈꿨던 지식인 귀토를 연기한 그는 슬랩스틱 연기도 불사하는 얼빠진 헛똑똑이 연기로 큰 웃음을 안겨줬다. 닉슨의 암살을 기도한 비크 역의 남문철과 정상훈은 기상천외의 성대모사로 40년 전 미국의 상황을 고스란히 지금 한국의 현실로 바꿔 놓은 마법을 부린다.
누가 케네디 죽음의 배후에 있는가. 미국연방수사국(FBI)이나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또는 마피아가 아니다. 남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할 때 조용한 절망에 빠진 채 살아간 사람들, 바로 어쌔신의 주인공처럼 못나고 어수룩한 존재들의 ‘한(恨)’이 아닐까. 케네디 암살 직후 흘러나오는 꼬마 빌리(김태민·탕준상)가 “모두가 잊겠지만/내겐 끝나지 않아/영원히”라고 부르는 노래가 일깨우는 케네디와 동시대인으로서 손드하임의 강렬한 죄의식이 거기 숨어 있다.
: : i : : 내년 2월 3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4만∼ 8만 원. 02-744-403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