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갈구하는 ‘힐링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겨울바다와 설산(雪山)이 있긴 하다. 그러나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 그마저도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좀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봄을 상상하며 미리 가보는 겨울여행은 어떨까? 겨울비가 내리던 3일, 충남 공주의 계룡저수지를 거쳐 갑사와 마곡사를 둘러보는 동안 기자의 눈은 내내 봄을 좇고 있었다.
‘새로운 여행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나서는 여행도 좋지만 한 군데를 정해놓고 계절을 바꿔가며 감상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장소가 주는 편안함과 느긋함도 몸과 마음엔 치유의 힘을 줄 것 같고….》 저수지는 원래 한국 일본 중국처럼 농경문화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일부 낚시꾼들을 제외하고는 ‘친수(親水)공간’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그런 저수지들이 변신하고 있다.
저수지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저수지 둑 높이기 공사를 하면서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주변의 ‘명품 저수지’를 말 그대로 수변(水邊) 휴식공간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주변 관광명소와 33개 농촌체험마을을 연계해 ‘삼삼(33)한 우리 강 나들이길’이라는 상품까지 내놨다. 4개 여행사를 통해 5월부터 내놨는데 10월 말 현재 8000명 가까이 이용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계백 장군의 갑옷을 형상화한 백제보→백제의 마지막 보루 부소산성→금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낙화암→생태관광명소 계룡저수지→역사가 숨쉬는 사찰 갑사로 이어지는 여행코스는 나름 인기다.
기자는 그보다 계룡저수지와 갑사 그리고 마곡사를 주목했다. 저수지는 농사가 시작되는 봄이 제철이다. 마곡사와 갑사는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을 만큼 봄과 가을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막 가을을 끝낸 갑사의 모습도 궁금했지만, 봄을 준비하는 마곡사와 계룡저수지를 상상하고 싶었다.
공주는 의외로 가까웠다. 어느 터미널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지만,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1시간 30분∼1시간 5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먼저 2009년 둑 높이기 사업을 시작해 작년 6월 공사를 마친 계룡저수지를 둘러봤다. 둑을 2m 높였더니 저수용량이 341만 m³에서 472만 m³로 무려 131만 m³나 늘어났다. 농민들의 물 걱정도 없앴지만, 저수지 풍광이 바뀌었다. 여기에 공주의 명물인 알밤을 형상화한 취수탑을 세우고, 수변덱과 함께 1.5km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저수지가 농민들에게만 몽리(蒙利)를 주는 시설물에서 벗어나 휴식을 원하는 시민들까지 몽리민(蒙利民)으로 품은 것이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수몰 나무들이 생겨났다. 물가엔 버드나무와 벚꽃나무, 개나리를 심었다. 봄이 되면 수몰 나무 그림자와 버드나무 잎, 그리고 벚꽃과 개나리가 어우러져 저수지는 새로운 향연을 펼칠 것이다. 둑 높이기 사업으로 다시 태어난 경기 여주의 금사저수지, 충북 청원의 한계저수지, 강원 원주의 반계저수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금사저수지엔 길이가 100m나 되는 국내 최장의 미끄럼틀이 설치돼 있어 어른도 어린아이가 될 수 있고, 낚시여행지로도 유명한 한계저수지는 새벽 물안개와 석양이 그만이다. 1950년 조성된 뒤 60여 년 만에 새로 단장한 반계저수지엔 수령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고…. 그런 상상을 하며 겨울비 내리는 저수지 산책로를 걸은 뒤 갑사로 향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갑사 가는 길’의 그 갑사는 계룡저수지에서 불과 4km 떨어져 있다.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30분 거리다.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년)에 아도 스님이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 진흥왕 때 자장 율사가 창건했다고도 하는 갑사. 갑사로 가는 길은 비록 가을이 아니어도 언제나 좋다. 갑사엔 보물 582호인 월인석보판목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고, 국보 238호인 괘불탱화가 있다. 괘불탱화는 법당 밖에서 불교 의식을 치를 때 걸어놓는 예불용 불화인데, 괘불탱화가 내걸리는 날은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보기 힘들다.
‘갑사 가는 길’은 동학사로 넘어가는 등산코스를 빼놓을 수 없다. 1박 2일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갑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동학사로 넘어간 뒤 하산하는 길에 유성온천을 들르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다시 공주 시내로 돌아와 무령왕릉을 돌아본 뒤 마곡사로 길을 잡을 수도 있다. 공주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7번)를 타고 40분이면 갈 수 있다. 마곡사가 있는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는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10군데 땅, 바로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한 곳이다.
그런 땅이어서인지 마곡사 가는 길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도 절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개울이 태극(太極)처럼 산사를 휘감아 돌기 때문에 한참을 걸어야 절 입구가 나타난다. 일제 경찰을 피해 마곡사에 은신했던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절 마당을 지키고 있는 마곡사는 ‘산사의 여유’라는 템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계룡저수지와 ‘갑사 가는 길’을 돌아 다시 터미널로 오는 길에 ‘계룡양조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양조장처럼 보여 잠시 걸음을 멈췄더니 ‘술 익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시구(詩句) 그대로였다. 주인장은 “100년이 넘은 양조장”이라고 자랑했다. 막 병에 담으려는 막걸리를 한 국자 받아 마셨다. 마치 봄기운에 취하는 듯 했다. 겨울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