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이병헌)이 신하들의 광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중전(한효주)의 오빠 유정호를 풀어준 이유다. 신하들은 충신인 유정호에게 역모의 죄를 씌운다. 마음만 먹으면 왕도 독살할 수 있는 신하들은 유정호를 죽여야 한다고 하선을 압박한다. 하지만 그런 위협도 중전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주고 싶은 하선의 마음을 굴복시키지는 못한다. 하선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중전의 웃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웃음을 보고 싶은 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가짜 왕 하선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비단 중전의 웃는 얼굴만이 아니다. 그는 어린 궁녀 사월이(심은경)와 조 내관(장광)의 얼굴에서도 웃음을 보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도 부장(김인권)도 예외는 아니다.
하선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만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궁궐 밖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백성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피어나길 욕망한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당장 시행하라고 명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만들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소중하오!”라며 대신들을 꾸짖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지로 끌려가는 수만 명의 군사는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선이 이토록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쉽게 전염되는 사람이다. 중전이 웃으면 하선 자신이 행복해진다. 반대로 중전이 아파하면 그도 아픔을 느낀다. 사월이의 웃는 얼굴은 그를 웃게 하고, 사월이가 울면 그도 눈물을 흘린다. 백성들의 웃는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지만 백성들이 겪는 고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심리적 통증을 경험한다. 하선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즉,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공감을 방해하는 권력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은 공감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공감기능을 담당하는 ‘거울뉴런(mirror neuron)’에 선천적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자폐증만이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신생아도 다른 아기의 울음에 공감반응을 보인다. 미국의 심리학자 그레이스 마틴 연구팀은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신생아들에게 여러 종류의 울음소리를 들려줬다. 아기들은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울다가도 울음을 멈췄다. 그런데 다른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듣고선 조용하다가도 갑자기 따라 울었다. 마르코 돈디 등의 연구에서도 신생아들은 자기 울음소리보다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더 자주 짓고, 이를 더 오래 지속했다. 다른 아기의 고통 신호에 ‘공감’해 자신도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반응한 것이다.
이런 공감능력을 갉아먹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권력의 맛’이다. 권력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취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한번 권력을 맛보면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에는 둔감해지고, 오로지 자신의 목표와 욕구에만 집중하게 된다. 실제로도 권력을 많이 가진 상사나 형이 상대적으로 적은 권력을 가진 부하나 동생의 감정이나 태도를 틀리게 판단하는 경우가 그 반대보다 훨씬 많다.
또 권력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조망하도록 만든다. 조지프 마지는 실험 참여자들에게 자신 앞에 앉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이마에 알파벳 ‘E’를 쓰도록 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려면 글자를 뒤집어서 써야 한다. 즉, 앞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E’를 써야 하는 과제였다. 실험 결과, 이전 과제에서 자신의 권력이 높아지는 느낌을 받았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권력이 다른 사람의 관점을 고려하는 것, 즉 공감을 방해한 것이다.
마음이 모여 왕을 만든다 사람들이 권력의 맛을 보면 약자의 목표나 욕구에 대한 관심을 잃기 쉽다. 하지만 하선은 달랐다. 왕의 권력을 경험한 후에도 그의 마음은 항상 약자를 향했다. 중전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인 양 괴로워하고, 사월이의 설움을 자신의 설움으로 느꼈으며, 백성들이 억울해하면 자신도 억울해했다.
하선은 다른 사람을 웃기는 광대로 살아왔던 인물이다. 누군가를 웃기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을 웃길 수 있다. 광대의 삶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선이 광대의 삶을 통해 키운 공감의 근육들이 그를 권력이라는 마약으로부터 지켜줬는지 모른다.
하선은 왕이 되고서도 약자를 바라봤다. 왕의 옷을 입고서도 광대였을 때처럼 다른 사람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주려 했다. 사월이, 조 내관, 중전, 도 부장 그리고 허균(류승룡)이 차례로 하선에게 마음을 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왕이 되었지만 광대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으려 애쓰는 하선은 결국 관객들의 마음까지 빼앗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모여 왕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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