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무엇인가에 신들려 있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장편소설의 초고를 올 7, 8월 단숨에 써내려갔다. 경북 포항을 비롯한 동해를 돌며 여관방, 민박집, 카페와 찻집, 해수욕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단 한 번의 연애’란 제목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연상시킨다. 작가가 뒤늦게 ‘연애소설’에 매진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책장을 덮으면 남녀의 애틋한 사랑보다는 푸른 바다 멀리 찬연히 뛰어오르는 한 마리 고래가 떠오른다. 아마도 작가는 신화처럼 넘실거리는 고래의 흔적을 찾아 올여름 내내 바닷가를 서성거렸으리라.
이야기는 포항의 어촌 구룡포에서 시작된다. 술고래 아버지와 해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세길은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도도한 인형같이 생긴 박민현을 본 뒤 단숨에 마음을 빼앗긴다. 압도적인 미(美)의 권력으로 동네 남자애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민현은 세길에겐 별 마음이 없다. 더군다나 서울에서 고교 유학 생활을 시작한 세길은 고향에 남은 민현과 멀어지고, 그만큼 애틋해진다.
작품이 생동감을 띠는 것은 이들이 성년이 된 후부터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나란히 입학한 이들은 1980년대 엄혹했던 대학가 풍경과 맞물려 극적인 만남과 이별을 이어간다. 특히 전경이 된 세길이 운동권 핵심이 된 민현의 체포 현장에 출동하게 되며 애절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소설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성석제표’ 웃음코드도 녹슬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세길이 ‘신(新)문물’을 몰라서 홍차 티백을 찢어 풀어넣은 뒤 휘휘 저어먹거나, 경양식집에 가서 수프가 나오자 밥 말아먹으려고 하는 모습에선 키득키득 웃을 수밖에 없다. 이런 에피소드가 작위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노련함 덕분이다.
작가는 후반부에 작품의 공간을 크게 확장시킨다. 고래잡이배의 포수였던 아버지를 둔 민현은 세계 굴지의 컨설팅회사 실세로 성장해 스스로 정치경제계 거물인 ‘빅 피시(Big Fish)’가 된다. 그는 다른 ‘빅 피시’들을 쥐락펴락하고 또 각종 정보를 이용해 경제적 약자들을 돕는 일에 나선다. 작품 초반에 소개된 고래 이야기가 마침내 수미상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포수는 민현만이 아니다. 진득이 기다리다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독자의 희열점을 정확히 조준해 명중시키는, 성석제 또한 노련한 포수다.
작가는 1982년 연세대 재학시절 찍은 ‘청년 성석제’ 사진을 책에 실었다. “팬 서비스 차원”이라는 농담어린 설명. 작가도 독자도 1970, 80년대 향수에 취하게 만드는 복고적 매력이 진한 한 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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