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 만나는 ‘소설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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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17일 03시 00분


유고시집 뺀 생전시 129편,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 담아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는 처음에 시인 지망생이었다. 등단 전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에 근무하던 1954년 6월 사보 ‘천일(天一)’에 ‘바다와 하늘’이라는 시를 싣기도 했다. 16연 159행의 장시(長詩)였다.

진주여고 출신인 그는 같은 학교 선배의 남편인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게 자신의 습작 시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김동리는 “소설을 써보라”고 권한다. 박경리 선생는 곧 소설 습작으로 방향을 튼 뒤,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다. ‘현대문학’ 1955년 8월호에 발표된 단편 ‘계산’이 데뷔작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박경리는 시심을 잃지 않았다. ‘못 떠나는 배’(1988년) ‘도시의 고양이들’(1990년) ‘자유’(1994년) ‘우리들의 시간’(2000년)과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2008년) 등 시집 5편을 펴낸 박경리는 어엿한 중견 시인이기도 했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 25년 동안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눌러쓴 ‘토지’의 지난한 창작과정 속에서도 시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시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견디기 어려울 때 시는 위안이었다. 8·15해방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문학에 뜻을 둔 것도 아닌 평범한 여자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여 살아남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1988년 시집 ‘못 떠나는 배’ 서문 중)

이런 박경리의 시들을 모은 ‘우리들의 시간’(사진)을 마로니에북스가 최근 펴냈다. 유고시집을 제외한 4권의 시집에 실렸던 시 129편을 한 권에 망라했고, 당시 서문도 곁들였다. 크게는 세상과, 작게는 원고지와 씨름했던 작가의 분투의 역사가 그대로 담겼다.

‘변명했지/책상과 원고지에/수천 번 수만 번/나를 부셔버리고 있노라//그러나/알고 보면 문학은 삶의 방패/생명의/모조품이라도 만들지 않고서는/숨을 쉴 수 없었다//나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운명론자도 아니다.’(시 ‘문학’ 중)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박경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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