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다음 날인 20일 오후 2시 반. 피곤한 눈으로 PC 모니터를 보던 박종진 채널A 앵커가 말했다. 두 달 가까운 ‘대선 특별 근무’를 끝낸 뒤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얼굴은 피로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새치가 많은 앞머리 일부는 위로 뻗쳐 있었다.
다수의 직장인에게 대통령 선거일은 쉬는 날이지만 언론인, 특히 투표 과정과 결과를 중계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의 하루다. 그나마 하루만 지나면 고생 끝이란 게 위안이 된다고나 할까.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처럼 방송 앵커들은 수면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물갈퀴질을 해야 한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가 종합편성채널 인기 앵커인 박종진 채널A 경제부장을 19∼20일 이틀간 동행 취재했다. 이 기사는 그를 통해 살펴본 대선 방송 진행자들의 애환과 무대 밖 이야기다.
“두 달 가까이 죽기 살기로 방송”
박 앵커에게 지난 두 달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쾌도난마’를 70분 진행하고 나서 조금 쉰 후에는 8시 50부터 2시간 20분 동안 대선 특집 저녁뉴스를 진행했다. 물론 프로그램 준비에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9일 오후. 그는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날은 오후 5시 반∼7시 50분, 오후 10시∼11시 50분 두 차례 방송에 들어가야 한다. “어제는 새벽 3시에 들어갔어요. 집에서 투표하고 오늘 낮 12시쯤 회사에 나와 빵으로 점심을 때웠지요.” 충혈된 눈에 연신 인공눈물을 짜 넣으며 박 앵커가 말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작가실. 쾌도난마와 저녁뉴스를 담당하는 작가 3명은 2개월간 매일 새벽에 퇴근하느라 신경이 꽤 날카로워져 있는 듯했다. 책상 위에는 먹다 만 빵과 테이크아웃 커피 컵, 햄버거 포장 봉투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박 앵커는 작가가 출력해 준 대본을 들고 18층 분장실로 향했다. 그는 좁은 칸막이 안에서 방송용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었다. “상당히 편해지거든요. 몇 시간 방송을 하려면 이게 필요해요.”
21층 분장실로 가는 길.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곤 19층과 20층 사이 층계참에 서서 대본을 든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했다. “오늘 방송도 하나님께 맡긴다고 했어요.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도 했고요. 기도를 하면 마음이 훨씬 편하거든요.”
분장실에서는 이미 화장독이 오른 그의 얼굴에 다시 분이 칠해졌다. 피곤한 얼굴색은 붓끝이 몇 차례 스치자 화사하게 변했다. “오늘이 대선이다. 마지막 힘을 내자.” 박 앵커가 파이팅을 외쳤다. 자신을 위한 독백에 더 가까운 듯싶었다.
언제, 어디서나 식사하는 사람 보여
드디어 도착한 1층 오픈 스튜디오. 거리와 맞닿아 있는 그곳의 공기는 상당히 쌀쌀했다. 그렇지만 방송 중에는 소음이 발생하는 히터를 켤 수 없다. 박종진 앵커와 그의 파트너 이언경 앵커 앞에는 방송 스태프 1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스태프들은 모두 패딩 점퍼를 입고 있지만, 앵커들은 2시간 넘게 얇은 정장만 입고 버텨야 한다.
두 앵커는 출구조사 결과가 틀렸을 경우 등 비상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기자는 ‘2분 전’ 사인에 맞춰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오후 5시 반. 대선 중계방송이 시작됐다. 피곤의 흔적은 간데없는 웃는 얼굴로 박 앵커가 말했다. “저도 40분 줄 서서 투표했습니다.” 초접전으로 출구조사가 나온 6시에는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밤 새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오후 8시. 1차 방송을 마친 박 앵커는 프로그램 출연자 대기실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원래 지난 두 달 동안에는 방송 사이에 식사를 하지 않았다. 배 속이 차 있으면 졸음이 올 수 있고 머리 회전도 둔해진다. “오늘은 추워서 힘들었어요. 에너지를 많이 쓴 것 같네요. 그래서 평소 안 먹던 라면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날 채널A 사무실에서는 시간에 관계없이 언제나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방송 시간에 맞추려면 밥 때를 챙길 수 없다. 4시 40분경 분장실에서 만났던 하란정 앵커는 아침 방송을 마치고 집에 가서 투표를 한 후 다시 나와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고 했다. 한쪽 구석엔 김치 봉지가 대본으로 덮여 있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방송 진행의 힘
10시 10분. 예정보다 10분 늦게 박 앵커가 다시 스튜디오에 섰다. 이후 개표 상황 중계와 출연자들과의 토론이 이어졌다. 11시 50분경,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 후보가 도착했다. 그가 당선 소감을 밝히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박 앵커가 말했다. “뭔가 어설프고 썰렁합니다. ‘국민의 시대를 열겠습니다’ 정도의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박 앵커는 ‘어수룩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만나 봐도 사람 좋은, ‘동네 연탄집 아저씨’(본인의 표현)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일수록 유능한 저널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이다. 편해 보이는 인상과 조금은 어눌해 보이는 말투에 취재원이나 출연자들은 심리적으로 무장해제가 되어버린다. 그리곤 가슴속에 있는 말을 모두 다 해준다.
박 앵커는 그동안 편안해 보이는 인상과 더불어 날카롭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기를 끌어 왔다. 시원시원하고 재미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솔직하고 담백한 방송, 지금까지 국내에서 보지 못했던 방송을 하고 싶었어요. 미국이나 유럽 방송을 보면 부러웠지요. 특히 유럽의 앵커들처럼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프로그램이 바로 국내 최초의 생방송 데일리 시사 토크쇼 ‘박종진의 쾌도난마’다.
“ 한가운데 서는 게 정말 힘들다”
다시 선거 다음 날인 20일 오후. 기자는 채널A 경제부에서 박 앵커를 만났다. 그는 대선 방송이 새벽에 끝난 후 간단한 리뷰회의를 하고 방송 출연자들이 기다리는 맥줏집으로 향했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했냐고 하니 “주로 정치 얘기죠”란 답이 돌아왔다. 방송에서 못다 한 얘기들, 특히 ‘박 당선자가 실력은 별로지만 선거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고 했다. 방송 당시 박 앵커는 출연자들을 열심히 ‘추궁’했지만 그들은 원론적인 얘기 이상을 꺼내놓지 못했다.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쉬는 게 소원입니다. 여행을 가고 싶어요. 지리산, 제주도, 동남아 어디든 휴대전화 끄고 일주일 쉴 수 있는 곳으로.” 아쉽게도 그의 소원은 이뤄지기 어려울 듯하다. 매일 쾌도난마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는 코에 여러 번 스프레이 약을 뿌렸다. 체력이 약해지자 찾아온 감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박 앵커가 시청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다.
“저에 대해 우(右)에서는 좌(左)라고, 좌에서는 우라고 욕합니다. 한가운데 서는 게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무게중심을 잡고 사회정의를 위한 한 조각 의 몸부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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