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신촌은 잠들지 않는 동네다. 요즘 같은 연말이면 더욱 그렇다. 자정을 넘은 도시는 좀처럼 시들지 않고, 인파들은 새벽까지 북적인다. 하지만 도시는 철저한 익명의 공간이다. 발 디딜 틈 없이 거리는 흥청거리지만 ‘나’, ‘너’는 철저히 외로운 개인이다. 마치 ‘뤼미에르(lumi`ere·빛)’를 향해 달려드는 밤 나방처럼, 덧없기도 하다.
작가는 도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을 끄집어낸다. 이들은 모두 신촌에 있는 오피스텔 뤼미에르와 크고 작은 연관을 맺고 있다. 작가는 데뷔작인 장편 ‘표백’에 이어 다시 신촌을 배경으로 삼았다. 전작이 신촌에서 대학을 보내는 20대 청춘들의 좌절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캠퍼스를 벗어나 오피스텔을 중심으로 좀 더 다양한 인물을 그린다. 뤼미에르 801호부터 810호까지 열 개의 방으로 풀어낸 단편 열 편이 그것이다.
소설집이 독특한 것은 단편 특유의 독특한 상상력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단편 ‘박쥐 인간’에서 801호에 살며 편의점과 만화 가게에서 일하는 10대 소년은 실은 박쥐 인간이다. 수십, 수백 마리의 박쥐로 변해 하늘을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박쥐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 깃든 공간에서 안온함을 얻는 존재라는 것. 이쯤 되면 박쥐 인간은 공상과학류에 나오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가녀리고 예민한 또 다른 존재임을 눈치챌 수 있다. 이것은 너와 나일수도, 아니면 도시 골목마다 출렁이는 슬픔의 근원일 수도 있다. 단편 ‘피 흘리는 고양이 눈’에서는 유기 고양이의 눈으로 신촌의 어두운 구석을 훑거나, ‘쥐들의 지하 왕국’에서는 신촌 지하에서 몰래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반인반서(半人半鼠), 즉 ‘쥐 인간(혹은 인간 쥐)’들의 치열한 생존기를 그린다. 일부 소설집을 읽을 때 느껴지는 동어반복이나 유사성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점은 이 책의 미덕이다.
형식적 변주도 흥미롭다. 네 번째 단편인 ‘마법매미’는 앞선 세 편의 단편과 나중에 나오는 단편을 연결하는 다리나, 휴게소 같은 역할을 한다. 작가가 ‘마법매미’ 속의 편집자로 분해 소설집을 직접 설명하거나 이후 전개의 힌트를 주기 때문이다. 이 단편에는 ‘시간의 언덕, 현수동’이라는 책 제목이 등장하는데, 언급된 다른 제목들과 달리 이 책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 소설이라 궁금증을 자아낸다. 차기작 제목인가?
작가는 ‘표백’으로 등단할 당시 ‘명징한 주제의식이 돋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에도 ‘삶어녀 죽이기’에서 인터넷 여론몰이의 폐해를 그렸고, ‘돈다발로 때려라’에서는 물질만능으로 빚어진 몰인간성을 비판하며 주제를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그 전개가 기술적일수록 미학성이 약해지는 느낌이 든다. ‘박쥐 인간’이나 ‘명견 패스’ 같은 물기 촉촉한 단편들이 더 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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