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가는 255m 지하도, 대한민국을 흠뻑 느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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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6일 03시 00분


국립중앙박물관∼이촌역 연결 ‘박물관 나들길’ 디자인한 김영세 대표
천장-바닥-좌우 벽면에 태극문양-사괘로 장식
“흐르는 가야금 연주 들으며 애피타이저 맛보듯 걸어요

박물관 나들길을 배경으로 선 김영세 이노디자인그룹 대표. 그는 태극기에서 매력적인 디자인 요소를 발견한다고 했다. 그가 디자인한 ‘한식 세계화 인증마크’도 태극기의 4괘를 이용한 것이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박물관 나들길을 배경으로 선 김영세 이노디자인그룹 대표. 그는 태극기에서 매력적인 디자인 요소를 발견한다고 했다. 그가 디자인한 ‘한식 세계화 인증마크’도 태극기의 4괘를 이용한 것이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정식이 나오기 전 애피타이저를 드시는 기분으로 걸으면 좋을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 지하철 이촌역을 잇는 지하보도 ‘박물관 나들길’이 27일 개통된다. 매년 약 300만 명이 이 박물관을 찾으며 이 중 60%인 180만 명이 지하철을 이용한다. 지금까지 이촌역에 내린 사람들은 지상으로 나와 회색 담장에 철조망을 얹은 미군부대 담길을 따라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전문 디자이너가 꾸며놓은 255m 나들길을 걸으며 박물관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됐다.

디자인을 총괄한 김영세 이노디자인그룹 대표는 “메인 박물관에서 정식 관람을 하기 전에 가볍게 전채요리를 먹는 느낌을 선사하고 싶었다”며 태극기를 소재로 한 디자인을 소개했다.

나들길로 접어들면 먼저 천장의 조명에 눈길이 간다. 검은 메탈 바탕에 설치된 흰색 조명들이 역동적으로 죽죽 뻗어 있다. 자세히 보면 조명은 태극기의 4괘인 건곤감리(乾坤坎離) 모양이다. 바닥엔 4괘 중 땅을 상징하는 ‘곤’이 반복되도록 화강석을 깔아 마무리했다.

“디자인회의 때 바닥에 4괘를 깔겠다고 했더니 ‘태극기를 밟고 지나가란 말이냐’는 반론이 나왔습니다. 제가 1초도 망설임 없이 말했지요. ‘그럼 곤만 그립시다.’”

박물관을 향해 서서 볼 때 나들길의 오른쪽 벽은 태극, 맞은편 벽은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을 형상화해 꾸몄다. 우선 알루미늄에 태극 선 모양을 따라 작은 구멍을 뚫고 뒤쪽에 조명을 설치해 구멍 밖으로 불빛이 태극 모양을 그리며 새어나오게 했다. 왼쪽엔 같은 원리로 박물관 소장품 모양의 불빛이 새어나온다.

김영세 대표가 태극기의 4괘를 이용해 디자인한 박물관 나들길의 벤치. 김영세 대표 제공
김영세 대표가 태극기의 4괘를 이용해 디자인한 박물관 나들길의 벤치. 김영세 대표 제공
나들길의 양쪽 벽면은 회색 톤이고, 천장과 바닥도 무채색이다. 이를 배경으로 양쪽 벽면에 뚫은 구멍으로 새나오는 불빛이 다양하게 변화하며 절제된 생기를 준다. 태극의 색깔을 배제하고 선만 살려놓으니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 바탕 음악으로 깔리는 황병기 씨의 가야금 연주곡 ‘실크로드’가 ‘모던 코리안’ 스타일의 나들길 디자인을 살려준다. 박물관으로 걸어가는 8분간의 경험을 디자인하면서 김 대표가 고른 곡이다.

“태극의 곡선은 한국인의 유연함을, 4괘의 직선은 강인함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보면 볼수록 태극과 사괘가 절묘하게 어울려 한국인의 특성을 잘 나타내지요.”

김 대표는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에 사업체를 두고 삼성전자 휴대전화, LG냉장고, 아이리버 MP3플레이어 등을 디자인한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다. 상업 제품을 디자인하는 틈틈이 한식 세계화 인증마크, 문화예술위원회의 문화예술 후원운동인 ‘예술나무’ 로고, 음주운전의 위험을 알리는 스티커 등 공공 영역의 디자인도 해왔다. 하지만 공적인 공간을 디자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나들길 프로젝트를 의뢰받고 “1km(255m×4)가 넘는 화폭에 대한민국을 담아보라는 주문을 받는 느낌이었다”며 아이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메모지에 나들길을 스케치한 것을 찍은 화면이었다. 의뢰를 받은 뒤 첫 스케치가 5분 만에 떠올랐다고 했다.

“그동안 생각하고 연구하고 고민해뒀던 것들이 잠재돼 있다가 필요할 때 터져 나온 것이죠. 제 작품으로 코리아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거든요. 아이디어는 뭘 뒤져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평소의 축적과 필요할 때의 몰입이 중요하죠.”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박물관 나들길#김영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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