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전, 문명국가 대부분의 산업기반은 농업, 즉 식물 기르기였다. 하지만 새로운 산업의 발전으로 식물 재배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신흥 산업 중 많은 부분은 농업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에서 19세기 들어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경제적 활동으로서의 식물 기르기와 무관하게 노동자의 ‘합리적 오락’으로서 가드닝(취미로 식물 기르기)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유행은 곧 영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 전 국민적인 취미 활동이 됐다. 물론 이전에도 동서양 상류층 사이에 부의 상징, 혹은 정신수양으로서의 식물 기르기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대중적 취미로서의 식물 기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중적 식물 재배의 역사적 배경에는 시골에서 이주한 공장 노동자들의 자연에 대한 갈망과 노동생산성 유지(펍에서 술 먹고 늦게까지 놀다 보면 다음 날 일에 지장을 받으므로)에 대한 공장주들의 관심이 있었다. 이후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일본에서도 능동적인 취미 여가 활동의 하나로 식물 기르기가 정착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9년 여가 활동 관련 자료에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항목이 몇 가지 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과 최저 수면시간, 최저 가사노동 시간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와 배치되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의 여가사용 시간이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적은 편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슷한 여가 시간을 즐기는 호주나 캐나다 사람과 비교할 때 삶의 만족도가 매우 낮다. 그 이유는 ‘한국여가백서’(2008년)의 여가 참여 활동 빈도 순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가 활동 상위에는 TV 시청, 잡담, 영화 보기, 외식, 쇼핑 등 ‘휴식형 여가
활동’이 올라 있다. 이런 활동은 창조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참여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수동적이며 휴식만을 지향하는 이런 여가
활동들이 삶의 만족도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을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식물 기르기가 여가 활동 종류를
묻는 객관식 문항의 보기(100개)에서도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에서 언제나 상위권에 오르는 원예가 우리나라에서는
100위에도 들어 있지 않다니! 설문조사 항목의 선정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식물 기르기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취미로 확고히 자리매김되지 않아 그랬을 듯하다. 즉 자신이 분명히 여가 시간에 식물을 기르고 있지만 그 행위가
영화 감상이나 등산, 독서와 같이 ‘그럴듯한’ 취미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이유로
원예 활동이 아직도 ‘영세한’ 측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선 아직도 주변의 남는 땅이나 화분에
주변의 흙으로 대충 꽃이나 채소를 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나쁜 건 절대로 아니지만 ‘폼’이 안 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모든 면이 긍정적이진 않지만 등산이란 취미가 최근 전 국민의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멋진 등산장비의 역할도
컸다. 마찬가지로 식물 기르기가 대중화되려면 멋진 원예용품과 그럴듯한 화단 디자인이 있으면 더 좋을 듯싶다. 취미활동은 전문도구를
적절히 이용할 때 묘미가 더해지는 법이다.
요즘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너도나도 차를 몰고 나오니 연말 연휴
기간에 외출을 하려면 차가 너무 막힌다. ‘에이, 이럴 땐 집에서 TV나 보며 낮잠을 자는 게 최고야’란 생각이 절로 든다. 이때
베란다에 팽개쳐둔 화분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어이, 주인님. 나를 보세요. 나와 같이 교감하며
대화를 나누면 당신 삶이 자연 속에 녹아들면서 심신이 치유될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는 먹을거리나 장식물
이외에도 무언가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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