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아들’ 중종반정 공 세워 가문 재건
아버지 정종 역모로 처형 뒤 세조가 궁궐로 불러들여 돌봐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 지극… 고모 ‘기별부인’ 정씨 사랑도 각별
‘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1455∼1512)가 주목받고 있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해주 정씨 대종가의 고문헌 1400여 점을 번역해 연구한 결과가 잇달아 공개되면서 핵심에 위치한 그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마침 올해는 그의 500주기였다.
정미수는 지난해 방송된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중심인물인 경혜공주(홍수현 분)와 영양위 정종(鄭悰·이민우 분)의 아들이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외동딸이자 단종의 누이였고, 정종은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발각돼 전라도 광주로 유배됐다가 능지처참됐다. 아버지의 귀양지에서 태어난 정미수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세조는 7세이던 그와 경혜공주를 궁궐로 불러들이고 그를 불쌍히 여겨 눈썹이 세도록 오래 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미수는 세조비 정희왕후 아래서 자랐고, 세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혜공주에게 노비와 재산을 하사했다. 정미수는 대역죄인의 아들이었기에 관직에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세조와 정희왕후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이고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유교적 가치관, 전래의 왕실 신앙인 불교적 가치관에 비춰볼 때 경혜공주의 삶을 온전히 하는 것은 세조의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었다”며 “형(문종)의 유일한 혈육을 보전해야 한다는 인간적 이유도 절실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종실록’에는 그가 말년의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들 정미수는 나이 16세로 공주가 병이 위독해지면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고, 옷은 띠를 풀지 않았으며, 똥을 맛보기까지 하면서 병을 보살폈다.”
경혜공주는 죽기 3일 전인 1473년 음력 12월 27일 유일한 혈육 정미수(당시 18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분재기(分財記)를 남겼다. 그를 아껴 재산을 물려준 조선왕실의 여인은 경혜공주뿐만이 아니었다. 고모와 외숙모의 사랑도 담뿍 받았다.
그의 고모는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과 이혼한 뒤 기별부인(棄別婦人)을 자처한 춘성부부인 정씨다. 1494년 자식이 없던 정씨는 친정조카 정미수(당시 39세)에게 자신의 제사를 부탁하며 노비와 논밭을 상속했다. 그의 외숙모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다. 정미수는 성종 조에 역시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의 시양자(侍養子)가 되기를 자청해 윤허를 받았다. 정순왕후는 정미수보다 9년을 더 살고 81세에 숨을 거두면서 노비와 재산을 정미수의 양자 정승휴에게 물려줬다. 정미수와 정경부인 전의 이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어 육촌아우 정수경의 아들 정승휴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는 훗날 중종의 사돈이 된다.
‘연산군일기’에는 정미수의 됨됨이를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미수는 문종의 외손으로 용모가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행동거지가 한가롭고 정중하여 바라만 보아도 곧 그가 왕손임을 알 수 있다. 젊어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문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는데, 달통하고 민첩하며 숙련하여 벼슬을 하여도 그르친 일이 없으므로 높은 관작에 이르게 되었다.”
1506년 51세의 정미수는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이 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책봉되면서 해주 정씨 가문을 재건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왕실 비운의 여인들의 내리사랑이 숨어있었다.
박 교수는 “정미수는 문종의 외손자이자 중종반정의 공신으로서 조선 초기 훈구세력의 특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며 “현재 학계에서 사림파 인물에 비해 훈구파 인물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해주 정씨 고문서를 통해 훈구파 인물 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해주 정씨 집안의 고문헌을 해석한 내용을 담은 ‘충(忠)을 다하고 덕(德)을 쌓다’를 ‘명가의 고문서’ 시리즈로 최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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