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다음 세상엔 꼭 내 딸로 태어나!
◇엄마와 딸/신달자 지음/220쪽·1만2000원·민음사
신달자 시인(70)이 결혼하고 서른 중반이던 1960년대 말. 시인의 노모가 딸네 집에 왔다.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풍경이 가득했던’ 집이었기에 시인은 빨리 가라고 노모의 등을 떠밀었다. 시인은 대문 앞에서 노모의 주머니에 1만 원짜리 한 장을 넣는다. “택시 타고 가.”
노모는 돈을 다시 딸의 주머니에 넣는다. “혼자 빨리 저 시장에 가서 짬뽕이라도 한 그릇 사먹어라.”
모녀는 1만 원짜리 한 장을 갖고 대문 앞에서 옥신각신 싸운다. 시인은 홱 돈을 길에 던져 버리고 대문을 쾅 닫았다. 조금 후, 대문을 밀고 나가 보니 길에는 돈도, 노모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그 만 원짜리 한 장을 거리에서 허리를 굽혀 주웠을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뼈가 저리다.”
엄마와 딸. 다른 피붙이랑은 느낌이 다르다. 딸은 엄마가 되고, 그 엄마는 다시 딸을 낳는다. 윤회 같은 질기고 애틋한 인연. 서로 가깝기에 그만큼 작은 일에 상처를 주고받고, 돌아서서는 금방 후회하는 바보 같은 관계. 신달자는 이번 에세이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를 되돌아본다.
신달자는 엄마와 딸의 모진 인연이 뼈저리게 삶에 스며든 사람이다. 내리 딸 여섯을 낳고 막내아들을 얻은 집에서 시인은 여섯 번째 딸이었고, 이제는 마흔 내외의 딸 셋을 둔 엄마다. 신달자는 부부 관계에서는 물질적·감정적 계산이 있을 수 있지만 모녀 관계는 그런 계산이 없다고, 이별 또한 부부 사이엔 존재하지만 모녀에게 영원한 이별은 없다고 말한다. “죽음도 그 이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는가.”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딸, “딱 너 같은 딸 하나만 낳아 봐라!”라는 엄마. 이들은 상대의 얼굴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다툰다고 시인은 말한다. ‘‘감정의 암’을 태우기 위해서 깊은 대화를 하라’, ‘편지로 마음을 전하라’, ‘엄마의 한을 딸에게 풀지 마라’ 등 여러 조언을 전하기도 한다. 연륜이 묻어나는 글들은 곱씹으며 되새길 만큼 공감이 간다.
‘신달자 산문’이 갖는 힘은 무엇보다 진실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들을 기대했던 집안에서 여섯 번째 딸로 태어난 핏덩이였던 자신을 엄마가 아무도 모르게 두어 번 뒤집어엎어 버렸다거나, 엄마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 기도를 했던 얘기를 덤덤히 전한다. 감추고 싶은 부분을 들춰내 먼저 손을 내밀기에 독자는 위로를 얻고 공감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인은 엄마와 딸 중에서 먼저 엄마가 물러서고 인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도 한때는 ‘못된’ 딸이었지만, 이제 일흔의 나이가 되니 엄마가 한없이 그립고, 딸들을 더 포용하게 됐으리라. 서로 사랑만 하기에도 삶은 짧다. 엄마에게 살가운 사랑을 전하지 못했던 시인은 허공에 외친다. “엄마! 다음 세상엔 꼭 내 딸로 태어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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