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것만으로도 질색이었다. 공부하는 진짜 재미를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논문만 마무리되면 일류대 교수 자리도 보장돼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30대의 나이에 일국의 수도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신수도 설계팀의 인선과 일에 대한 자율성을 약속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웬걸? 정부는 이미 충남 공주 인근 연기평야를 행정수도로 정하고 특별법은 물론 재원 조달과 이주민 대책까지 끝낸 상태였다. 심지어 일본인 건축가가 만든 신수도 설계안까지 쥐고 있었다.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정중앙을 차지한, 정권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 권위주의적 도시의 모습이었다. 새로운 수도시민들의 조화로운 삶과 민주적 일상을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시민들이 숨쉬기 힘든 유령 같은 도시가 되겠지…. 자신이 살아갈 도시라도 그렇게 설계했을까? 인간적인 풍경을 만들고 싶다.’ 미국에서 갓 귀국한 신출내기 도시공학자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68·사진)은 이렇게 생각하고 청와대에 맹렬히 항의했다. “일본 건축가에게 수도 설계를 맡길 순 없다,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설계하자. 젊은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다. 아니라면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겠다.” 서울의 풍경을 만들어간 선비
혹시나 2000년대의 상황이라고 오해할 분도 있을 듯싶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78년 이야기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공주 연기평야에 들어설 신수도를 설계하고 있었다. 신수도 계획기관이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중심으로 한 신진학자들은 2년여 동안 준비한 설계안을 박 대통령 책상 위에 올렸다. ▼ 꿈속의 서울풍경 그리던 소년, 그 꿈대로 SEOUL 만들다 ▼
●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의 인생을 바꾼 풍경
널리 알려진 대로 이후의 급작스러운 정국 변화로 수도 이전 구상은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뜻밖의 성과도 있었다. 한 도시연구자를 서울이란 공적 영역에 붙잡아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교수를 꿈꿨지만 의외로 공무(公務)가 내게도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죠. 공공영역이란 작품이 중심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더군요.”
건축가, 도시설계가, 행정가, 도시학자, 도시역사박물관장. 강홍빈 박사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다종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삶을 적절하게 포괄해 내는 단어는 단연코 풍경(風景)일 것이다. 실제 그의 인생은 한 폭의 풍경화에서 시작해서 결국엔 이 땅의 도시들, 특히 서울의 풍경으로 시나브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1979년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10년을 공부하고 돌아온 강홍빈. 그는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도시설계분야를 꽃피우고 싶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이내 상황이 뒤죽박죽이 됐다. 어렵사리 모아놓은 인재들이 정권교체와 함께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에 그는 비분강개했다. 혼자서만 대학으로 도망칠 순 없었다. 반드시 인재들이 건축과 도시를 위해 열정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다짐은 이후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환경대학원 전신), 주택공사 주택연구소를 거쳐 서울시의 싱크탱크인 시정개발연구원과 서울역사박물관 설립으로 꽃을 피웠다. 그는 이런 공공연구기관을 통해 서울의 풍경을 가다듬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삐죽빼죽 솟아 있던 외인아파트가 사라지고 제 모습을 찾은 남산, 600년 전통을 끌어안고 살아남은 북촌의 한옥마을, 몽촌토성을 포근히 감싸 안은 모던한 올림픽공원, 갈대가 운치 있게 흩날리는 상암동의 하늘공원과 이웃한 선유도공원의 파격적 아름다움까지…. 오늘날 “서울의 풍경이 은근히 보기 좋다”고 만족하는 이들이라면 강홍빈이란 존재에 대해 한번쯤은 고마움을 표시해도 좋을 듯싶다. 서울의 풍경을 그만큼 집중적으로 고민한 인물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풍경 속에서 도시를 발견하다
그런데 도대체 풍경이란 게 뭐 그리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풍경(風景)이란 그냥 눈에 들어온 경치만이 아니에요. 그 풍경을 만들어낸 역사적 과정, 부분과 전체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활동과 인생사의 우여곡절까지 모두 녹아있는 거대한 세계인 셈이죠.”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부산 피란시절엔 자갈치시장 앞 영도다리를 그려 처음으로 상을 탔다. 미술재료가 부족한 시절이라 버드나무를 태워 목탄을, 대나무를 잘라 펜촉을 만들었다. 서울로 돌아와 경기중학교에 입학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도 바로 미술반이었다. 경기중고교를 다녔다고 하기보다 “별관 2층 미술반을 졸업했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그림과 화집에 빠져 살았다.
경기 미술반에선 얌전히 화실에 틀어박혀 정물화나 인물화를 그린 게 아니었다. 학생들은 매일 교문 밖을 뛰쳐나가 펄펄 살아 숨쉬는 도시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도 삼청동에서 가회동에 이르는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따라 줄지어 선 서울의 일상 풍경을 기록했다.
풍경은 건물 하나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풍경에는 건물과 장소를 이어주는 길,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런 풍경이 하나씩 연결되면 도시 전체가 이뤄진다. 그의 화폭엔 쇠락한 한옥집의 연탄가스 고민이 담겼고, 종로통의 6층짜리 화신백화점이 마치 뉴욕의 마천루처럼 위용 있게 담겼다. 전쟁의 상흔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서울은 작고 초라했지만 골목을 뛰어다니던 소년에게 사회문화적 이상과 심미적 감수성을 주기에 충분한 역동성이 있었다.
미대에 진학할 용기가 없던 모범생은 타협책으로 건축과를 지망했다. 하지만 실망의 연속이었다. 조형미를 챙기는 건축과에서 그는 아무런 감흥을 못 느꼈다. 당대 최고라 불리는 김중업 선생의 아틀리에에서 사숙하는 행운을 얻었지만, 사정은 엇비슷했다.
“단일 건물의 기능이나 모양에는 매료될 수가 없었어요. 도시적 관점에서 보면 건물은 세포일 뿐이잖아요. 건물이 담아내는 인간생활이나 건물과 도시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의 모든 고민의 근본 원인은 바로 ‘건축’이 아니라 ‘도시’에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맞닥뜨린 곳도 도시였으며, 개개인의 생로병사가 일어나는 무대 역시 도시이며, 의식주와 문화활동의 수요 공급 사이클이 이뤄지는 공장이 바로 도시다. 그에게 도시란 새로운 환경이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1967년 그는 새로운 길잡이를 찾아냈다. 건설부 산하에 세워진 ‘주택·도시 및 지역계획연구소(HURPI)’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도시설계를 공부한 미국인 오스월드 네글러를 만나 ‘도시학’을 처음 접했다. 오스월드는 서울 전통 주거지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만리재 달동네까지 올라가 베개와 이불 옷장의 크기까지 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건축학에서는 보지 못했던 동네와 도시에 대한 애정, 사람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싹텄다. 그는 즉시 유학을 결심했다.
과거에 대한 애틋함
1980년대는 유신시대의 연장이면서 전 국가적 역량이 올림픽에 모아졌던 기간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서울은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강홍빈은 앞서 설명한 연구기관들을 통해 서울의 변화에 누구보다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서울시장들의 주요 자문역으로 참여한 것이다.
결국 그는 도합 세 차례(1990, 1998, 2009년)나 서울시장의 부름을 받고 시청으로 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가 됐다. 어머니 이기옥 여사가 “기껏 뒷받침했더니 교수가 아닌 시청 공무원이냐”며 실망하실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달라진 서울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인물도 흔치 않았다. 그를 본격적으로 서울시로 불러낸 고건 전 서울시장은 1999년 그에게 ‘행정1부시장’을 맡겼다. “시청 공무원이 됐더니 서울의 이 언덕 저 물줄기 모두 내가 책임을 다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오랜 여행 끝에 고향에 돌아온 듯한, 고기가 물을 만난 느낌이었죠.”
가회동 한옥보존지구 문제를 풀어낸 것도 바로 그의 노력이었다. 198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서울시장과 주민까지 오래된 한옥의 철거를 요청했다. 한옥이 자부심의 대상이기는커녕 척결해야 할 구악으로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그는 주민들을 다독이며 전통 동네에 적합한 새로운 주거모델 개발을 위해 발로 뛰어다녔다. 신기한 것은 올림픽 때는 사람들이 온통 재개발을 원했고, 월드컵 때가 되어선 가회동 같은 한옥마을을 지키려고 애를 쓰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는 것이다. 어느새 달동네의 소중함까지 인식하는 시대가 되어 있었다. 행정가로서는 과거의 결정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인류학자로서는 해야 할 과제도 생겼다. 바로 미래의 문화유산을 미리 챙기는 일이다.
2009년 그는 자신이 착안해 만든 서울역사박물관 관장직을 맡았다. 이곳을 통해 ‘오늘’이란 시대와 상황을 만든 이전의 모습과 풍경을 보여주고자 한다. 거기서 조그만 호기심이 생기고 서울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도시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지만 인간이 가꾸어야 할 대상이고, (…) 경험된 것임과 동시에 꿈꾸어진 것이다. 도시는 인간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다.’
그가 평생을 암송했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속 이 대목처럼 서울이란 한국인이 만든 가장 큰 발명품이었고, 강홍빈에게는 거대한 꿈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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