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상관없어, 먼 곳이면” 데프톤스 ‘Be quiet and drive (far away)’(1997년)
#1 우리 집에 자가용이 생긴 건 내가 중학교 때였을 거다. 가뜩이나 말수가 적었던 난 형이 모는 차를 타면 침묵과 공상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 들었다. 카오디오로 듣는 음악은 환상적이었다.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끝없이 몰아쳐 오는 음향의 파도는 고막과 숨통을 조여 왔다. 내 뇌를 전기적으로 고문해 질식시켰다. 가족 구성원 여러 명이 함께 차에 타서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없게 되면 귀에 이어폰을 끼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다. 시속 60km로 창밖을 스치는 세상은 나만을 위한 뮤직비디오가 돼 줬다.
#2 미국 새크라멘토 출신의 6인조 얼터너티브 메탈 밴드 ‘데프톤스’의 음악은 때론 로션 같았다. 그들의 노래 중에 ‘로션’이란 곡이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나 보다. 악기들이 사납게 쏟아내는 저음과 고음은 육중한 동시에 날카로웠다. 유분이 많은 로션처럼 귀에 들러붙었다. 보컬 치노 모레노는 상처 입은 참새처럼 속삭이거나 예쁜 멜로디를 부드럽게 부르다가 때로 필사적으로 절규했다. 일관되게 으르렁거리거나 탁한 목소리를 내는 다른 헤비메탈 보컬들과 달리 그의 노래에서는 섬세한 격정이 피부처럼 만져졌다. 데프톤스의 정규 2집 ‘어라운드 더 퍼’(1997년)에 실린 ‘비 콰이어트 앤드 드라이브 (파 어웨이)’는 이런 밴드의 특징이 고밀도로 축약된 드라마틱한 곡이다.
#3 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은 날, 난 맥줏집에서 이 노래를 신청했다. 고속으로 창밖을 지나는 전신주의 왜곡된 이미지를 떠올리며 눈앞의 술잔에 연방 입을 가져다댔다. 기타는 잔뜩 일그러진 소리로 긴장음이 섞인 두 가지 화성을 반복하고, 드럼과 베이스는 두툼한 음파를 듣는 자의 심장 깊이로 못질해왔다. 천둥처럼 몰아치는 악곡과 대비되는 모레노의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노래했다. ‘이 작은 도시는 내 것 같지 않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어. 멀리./너에게 그녀의 옷을 입혔지. 그러니까 날 멀리로 데려다줘.’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누구일까. ‘네가 나만의 것이란 것을 아니까 기분 좋아. 이제 날 멀리로 데려다줘.’ 소도시에서 그녀에게 상처를 입은 이는 조수석에 앉아있을까, 뒷자리에 앉아있을까. 그가 성난 목소리로 다그치기 시작한다. 독백인지 모른다. ‘어디든 상관없어. 그저 멀리!/어디든 상관없어, 멀리!/어디든 상관없어. 멀리! 멀리!!’ 마지막 문장은 편집증적으로 반복돼 넘친다.
#4 오후 8시. 차가 없는 내가 740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는 연남동, 동교동, 노고산동, 대흥동, 공덕동의 노랗고 빨간 불빛을 차례로 지난다. 어두워진 도시 전체가 날 스테디캠 위에 태우고 푸른 밤의 해부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용산을 지난 버스는 마침내 잠수교에 올라탄다. 로봇 같은 플로팅아일랜드가 눈앞에 다가온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난 한강의 폭에 놀랐다. 밤이 오면 강물은 검은 물밑에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고도 침묵을 지킬 수 있을 것처럼 아득했다. 뮤직비디오 속에서 밴드는 회색 다리 밑에서 연주한다. 거친 악곡이 내 귓속으로 폭우를 쏟아낸다. 뮤직비디오 속 모레노는 이제 뱀처럼 꿈틀대는 호스를 손에 쥐고 광인처럼 바닥에 물을 뿌려댄다. 사납게 첨벙대는 단속적인 리듬이 악곡을 결말로 몰고 간다.
#5 버스에서 내린다. 서초동의 정거장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오늘밤 갈 수 있는 거리는 이만큼이다. 차가운 거리는 내 속삭임으로 가득 찬다. 홍수가 난다. 도시는 보지 못한다. ‘어디든 상관없어, 멀리. 어디든.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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