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흑백영화(1940년)가 원작이다. 히치콕이 할리우드에 진출한 첫 작품이자 그의 영화 중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팬이 꼽는 히치콕의 걸작 반열에 들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히치콕 영화의 매력인 ‘낯설게 하기’보다는 할리우드가 좋아할 만한 ‘왠지 익숙한 이야기’의 구조를 살짝 비트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히치콕 영화 ‘새’의 원작자이기도 한 영국의 여성 소설가 대프니 듀 모리에(1907∼1989)가 쓴 ‘레베카’는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1847년)를 닮았다. 제인 에어의 스릴러 판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제인 에어’처럼 주인공 여성의 1인칭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만 구체적 이름 없이 ‘나’로만 등장할 뿐이다. 고아처럼 자란 가난한 주인공 ‘나’는 영국 명문 귀족과 결혼해 꿈같은 대저택의 안주인이 되지만 그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두운 비밀에 눈을 뜬다. 주인공은 그 비밀의 충격을 딛고 순애보적 사랑을 택하지만 대저택은 화재로 재가 되고 그들의 사랑은 그 재를 먹고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여기서 ‘나’(김보경)는 소심한 제인 에어이고, 명문 귀족 막심 드 윈터(오만석)는 더 멋지고 잘생겨진 에드워드 로체스터다. 막심의 대저택 맨덜리는 로체스터 가문의 손필드 저택이고, ‘나’를 숨 막히게 압박하는 맨덜리의 집사 댄버스 부인(옥주현)은 비밀의 열쇠를 쥔 하녀 그레이스 풀에 해당한다.
‘제인 에어’와 차별화되는 반전은 존재한다. 바로 제목에 등장하는 레베카라는 여인이다. ‘제인 에어’에선 여주인공의 대척점에 서 있는 로체스터 부인이 광기에 사로잡힌 뒤 골방에 갇혀 사는 추악한 존재로 등장한다. ‘레베카’에선 그 역할이 여주인공의 숨통을 조일 만큼 완벽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이었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한 레베카로 바뀌었다.
히치콕의 영화는 이를 파고들었다. 레베카는 진짜 죽은 것일까. 살아있다면 언제 등장할 것인가. 죽었다면 그 죽음의 원인은 뭘까. 부재하는 레베카를 대신해 그를 숭배하는 댄버스 부인이 ‘나’를 열패감의 끝없는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처음엔 화려해 보였던 맨덜리 저택도 음산한 복마전으로 바뀐다.
뮤지컬은 이런 영화의 전략을 더 밀어붙인다. 극 전개상 조연에 해당하는 댄버스 부인에게 주역의 비중을 부여한다. 2시간 40분의 공연 시간 중 무려 네 차례나 울려 퍼지는 타이틀곡을 부르며 관객을 사로잡는 이가 그다. 이에 앞서 “영원한 생명/죽음을 몰라/그녈 굴복시킬 순 없어 그 누구도/우리 곁에서/ 숨을 쉬어 난 느낄 수 있어”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노래를 통해 레베카의 부재를 강렬한 현존으로 바꾸는 존재도 댄버스 부인이다.
댄버스 부인과 호흡을 같이하는 듯이 꿈틀거리는 맨덜리 저택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한 무대(정승호)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레베카가 잠든 검푸른 바다를 입체적 영상화면을 배경으로 장면에 따라 대저택의 내부를 원경과 근경으로 포착한 무대 디자인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한껏 드높였다. 특히 2막 첫 장면에서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를 열창할 때 보랏빛 커튼이 휘날리는 레베카의 침실이 360도 회전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콤비인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다시 힘을 합쳐 만든 이 오스트리아 뮤지컬의 매력은 예의 르베이의 음악에 힘입는 바가 더 크다. 댄버스 부인의 노래가 가장 인상적이지만 배역마다 필살의 노래를 한 곡씩 갖췄다는 점에서도 르베이 뮤지컬답다. 최근 소개되는 유럽 뮤지컬은 B급 뮤지컬에 불과한데 국내 뮤지컬 팬심을 타고 과대평가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은 예외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영화에 이어 뮤지컬에서도 결말 부분에서 남녀 주인공의 죄의식 부재를 해소하지 못한 결정적 약점이 존재한다. 오스트리아가 아닌 영국이 배경인데 남자 주인공 이름을 맥심이 아닌 막심으로 옮기고 치안판사를 경찰서장으로 오역한 점도 옥에 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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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으로 임혜영, 막심 역으로 유준상과 류정한, 댄버스 부인 역으로 신영숙이 번갈아 출연한다. 로버트 조핸슨 연출. 3월 31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5만∼13만 원. 02-6391-6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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