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버린 게 아니라, 아직 오고 있는 중인 거야.”
드라마 ‘보고싶다’(MBC·2012∼2013년)
학생식당에서 식권을 살 때면 늘 배식구를 따라 늘어선 줄의 길이를 먼저 확인하던 그. “아무거나 먹으면 어때. 굳이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잖아.”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가게 앞에서 한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기숙사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을 땐 주문한 지 10분도 안 돼 “왜 안 오지? 전화 한번 해봐”라며 보챘다.
그를 만났다. 군대를 다녀온 후 졸업할 때까지 그의 등에 매달려 다녔던 낡은 검은색 배낭 대신 갈색 서류가방을 들고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소주 한 잔에 그의 얼굴이 발개졌다.
“지난번에 소개팅으로 만났던 여자는 계속 연락해?” “아니.” “언제까지 기다릴래?”
드라마 ‘보고싶다’를 보며 그를 떠올렸던 이유. 기다리는 일이라면 질색했던 그는 아직도 첫사랑을 기다린다.
‘보고싶다’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 사라졌던 수연(윤은혜)은 14년 만에 ‘조이’라는 이름으로 첫사랑 정우(박유천) 앞에 나타난다. 사건 당시 정우가 자신을 버렸다고 믿는 조이는 자신이 수연임을 부정한다. “기다려도 안 오면 버린 거예요”라며 다시 만난 정우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오로지 수연만을 기다려온 정우는 그녀에게 말한다.
“14년을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지 뭐. 수연이 집 앞에 가로등이 있는데 거기서 집까지 280걸음. 14년 동안 멀어졌다면 돌아오는 데 몇 걸음이나 될까? 당신이 틀렸어.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버린 게 아니라, 아직 오고 있는 중인 거야.” 씁쓸하게 웃음 짓는 그의 얼굴 위로 TV 속 정우의 얼굴이 겹쳐진다. 마침 술집 스피커에서 리처드 막스가 1989년에 발표한 ‘라이트 히어 웨이팅(Right here waiting)’이 흘러나왔다. 리처드 막스가 자신의 부인 신시아 로즈에게 바친 노래.
‘내 심장이 얼마나 부서지든 난 여기서 당신을 기다릴게요(how my heart breaks I will be right here waiting for you).’
며칠 전에도 그녀의 집 앞에 다녀왔다고 했다. 간만에 받은 휴가 날 아침부터 그녀의 아파트 출입구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반나절을 보냈다.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부모님이 친척 모임에라도 다녀온 날이면 괜스레 눈치가 보인다. 주말 사내 족구 모임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몇 번의 거절이 이어지자 이제는 “혹시 어디 문제 있어요?”라며 진지하게 물어오는 이들도 있다.
“참 이상해. 일부러 기다리겠다고 마음먹는 건 아닌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그녀가 생각나는 거야.”
주말이면 그녀와 함께 갔던 식당을 찾아가고, 그녀가 좋아했던 책을 읽는다. 그녀가 오면 얼마나 열심히 그녀를 기다렸는지 말해주기 위해 그녀의 생일에 부치지도 못할 카드를 적는다.
소설가 김언수는 장편 ‘캐비닛’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외계인 무선통신’은 외계 행성에 전파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외계인 무선통신’은 변호사 서기, 빌딩 청소부, 트럭 운전사, 피아니스트, 배관공같이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아무 상관없는 회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집 마당이나 옥상에 거대한 안테나를 올리고 고출력 증폭기를 사용하여 매일 여섯 시간에서 열두 시간씩 외계 행성으로 꾸준히 전파를 보낸다. 외계인으로부터 답장이 오느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날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는 내 생각이고 ‘날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조금 늦는군요’는 그들 생각이다.
‘그녀가 돌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는 내 생각이고,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가 조금 늦는군요’는 그의 생각이다.
desdemona98@naver.com 동그라미 동아일보 기자. 10년 동안 가까워졌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몇 걸음이나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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